<잡담 171 - 있을 때 잘해! 유효기간 남았을 때 아껴!>
“아프다...”
“안약 넣어 줄께! 잠시만 기다려”
시력이 상실되어 쓸모없게 된 아내의 한쪽 눈이 오래도록 말썽입니다. 바늘로 찌르는 통증, 망치로 맞는 듯 넓은 통증, 빼내는 듯 매운 통증... 참 종류도 여러 가지로,
보지도 못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적출‘이라는 안구를 빼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눈이 있어야 할 곳에, 없어서 따라오는 심미적인 결핍감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눈이... 안 보여, 한 쪽은 사선으로 두 개가 보이고 군데 군데 까맣게 펑크난 채로 보여! 나 어떡해...”
아내의 눈에 이상이 오던 날 그랬지요. 오른쪽 동공 속에 까만 눈동자가 마치 계란프라이 할 때 노른자처럼 정중앙에 그냥 둥둥 떠서 좌우로 움직이지 않는 그 충격적인 모습... 왼쪽 눈은 달력속의 여기 저기 날짜가 오려낸 듯 사라지고 까만 빈자리로 보인다는 황당한 아내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사람은 바깥의 것들을 여러 입력수단으로 인식합니다. 귀로 듣고 코로 맡고 손이나 발, 그 밖의 여러 기관으로, 그러나 눈으로 알고보고 받아들이는 양이나 깊이는 그 나머지를 전부 합친 것 만큼이나 비중이 큽니다. 부분적인 어떤 일에서는 다른 기관이 더 뛰어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보통 보편적 생활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옛날 말에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했나봅니다.
그런데 이게 수명이 한정이 있습니다. 무한정 사용가능하지 않고 유효기간이 있다는 거지요.
그걸 아껴서 사용하지 않는 미련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만약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걸 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한 것, 아름다운 것, 꼭 필요한 것만 볼 것입니다. 아끼고 아껴서 최대한 오래, 귀하게 쓸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사고나 질병으로 시력을 상실하지 않는 경우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소홀하게 굴립니다. 몸값의 90%나 되는 그 소중한 지체 기관을 말입니다. 정작 보지 못하게 되면 엄청 후회와 좌절을 하면서도 말입니다.
한 번 눈을 감아보십시오. 그리고 평소 하던 일을 해보세요.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TV를 켜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가보거나, 아마도 숨이 막힐 정도로 불안하고 진땀이 날 것입니다. 시력이 보이지 않는 분들도 아주 오랫동안 적응하고 훈련하며 익혀도 늘 긴장한다고 합니다.
“나, 눈이 안보여.. 자꾸 흐려지고 선이 다 두 개씩으로 보이네?”
“저기 강대상 벽의 스크린에 있는 찬송가 가사도 못 읽겠어, 뿌옇고 겹쳐져 보여서, 안경을 새로 맞추어야 할까?”
요즘은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자주 아내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책을 보다가 눈이 너무 아파서 종종 덮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고 잦아지는 걸 몸으로 느낍니다. 남은 횟수가 많지 않거나 너무 많이 사용해버렸나 봅니다. 정말 꼭 필요한 것에만, 소중하게 사용했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유효기간, 사용횟수가 많이 남았을 때부터 아끼고 골라서 쓰고, 자주 쉬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이가 들어도 쉽게 망가지지 않고 빨리 마모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젊은 날에 그렇게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는 안 써도 될 무익한 것을 보느라 낭비도 하고, 때론 나쁜 것을 보느라, 쓸모없는데 시력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설마 나중 어느 날에 이렇게 조금 남은 상태로, 아파가면서 살게 될지는 몰랐지요.
그런 걸 일찍 실감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요. 사람들이 이론으로는 그거 다 압니다. 인정도 하고, 그런데도 참 그런 게 안 됩니다. 왜 이리 어리석고 미련할까요? 참 딱하고 불쌍합니다. 내 자신 스스로가...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네요.
“있을 때 잘해!” 그리고 또 하나가 더 붙네요. “유효기간 남았을 때 아껴!”
- 그래도 아내여, 당신을 향한 내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그렇고, 세상을 떠나거나 우리가 이별할 때까지 그러기를 늘 기도합니다. — 안정숙님과 함께.
“아프다...”
“안약 넣어 줄께! 잠시만 기다려”
시력이 상실되어 쓸모없게 된 아내의 한쪽 눈이 오래도록 말썽입니다. 바늘로 찌르는 통증, 망치로 맞는 듯 넓은 통증, 빼내는 듯 매운 통증... 참 종류도 여러 가지로,
보지도 못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적출‘이라는 안구를 빼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눈이 있어야 할 곳에, 없어서 따라오는 심미적인 결핍감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눈이... 안 보여, 한 쪽은 사선으로 두 개가 보이고 군데 군데 까맣게 펑크난 채로 보여! 나 어떡해...”
아내의 눈에 이상이 오던 날 그랬지요. 오른쪽 동공 속에 까만 눈동자가 마치 계란프라이 할 때 노른자처럼 정중앙에 그냥 둥둥 떠서 좌우로 움직이지 않는 그 충격적인 모습... 왼쪽 눈은 달력속의 여기 저기 날짜가 오려낸 듯 사라지고 까만 빈자리로 보인다는 황당한 아내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사람은 바깥의 것들을 여러 입력수단으로 인식합니다. 귀로 듣고 코로 맡고 손이나 발, 그 밖의 여러 기관으로, 그러나 눈으로 알고보고 받아들이는 양이나 깊이는 그 나머지를 전부 합친 것 만큼이나 비중이 큽니다. 부분적인 어떤 일에서는 다른 기관이 더 뛰어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보통 보편적 생활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옛날 말에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했나봅니다.
그런데 이게 수명이 한정이 있습니다. 무한정 사용가능하지 않고 유효기간이 있다는 거지요.
그걸 아껴서 사용하지 않는 미련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만약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걸 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한 것, 아름다운 것, 꼭 필요한 것만 볼 것입니다. 아끼고 아껴서 최대한 오래, 귀하게 쓸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사고나 질병으로 시력을 상실하지 않는 경우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소홀하게 굴립니다. 몸값의 90%나 되는 그 소중한 지체 기관을 말입니다. 정작 보지 못하게 되면 엄청 후회와 좌절을 하면서도 말입니다.
한 번 눈을 감아보십시오. 그리고 평소 하던 일을 해보세요.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TV를 켜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가보거나, 아마도 숨이 막힐 정도로 불안하고 진땀이 날 것입니다. 시력이 보이지 않는 분들도 아주 오랫동안 적응하고 훈련하며 익혀도 늘 긴장한다고 합니다.
“나, 눈이 안보여.. 자꾸 흐려지고 선이 다 두 개씩으로 보이네?”
“저기 강대상 벽의 스크린에 있는 찬송가 가사도 못 읽겠어, 뿌옇고 겹쳐져 보여서, 안경을 새로 맞추어야 할까?”
요즘은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자주 아내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책을 보다가 눈이 너무 아파서 종종 덮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고 잦아지는 걸 몸으로 느낍니다. 남은 횟수가 많지 않거나 너무 많이 사용해버렸나 봅니다. 정말 꼭 필요한 것에만, 소중하게 사용했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유효기간, 사용횟수가 많이 남았을 때부터 아끼고 골라서 쓰고, 자주 쉬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이가 들어도 쉽게 망가지지 않고 빨리 마모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젊은 날에 그렇게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는 안 써도 될 무익한 것을 보느라 낭비도 하고, 때론 나쁜 것을 보느라, 쓸모없는데 시력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설마 나중 어느 날에 이렇게 조금 남은 상태로, 아파가면서 살게 될지는 몰랐지요.
그런 걸 일찍 실감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요. 사람들이 이론으로는 그거 다 압니다. 인정도 하고, 그런데도 참 그런 게 안 됩니다. 왜 이리 어리석고 미련할까요? 참 딱하고 불쌍합니다. 내 자신 스스로가...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네요.
“있을 때 잘해!” 그리고 또 하나가 더 붙네요. “유효기간 남았을 때 아껴!”
- 그래도 아내여, 당신을 향한 내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그렇고, 세상을 떠나거나 우리가 이별할 때까지 그러기를 늘 기도합니다. — 안정숙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