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내가 열어야 할 문은?

희망으로 2014. 6. 10. 08:08

우르릉.... !’

 

하늘 한편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내내 찌는 듯 덥고 끈적거리더니 기어이 후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빗방울이 열린 창문 사이로 마구 튀어 들어옵니다.

 

~ 살 것 같다! 시원하게 비 잘온다!”

 

그렇게 오는 비를 구경하며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기분으로 흥겹게 빗소리를 감상했습니다. 아마도 며칠 째 더위와 메마른 가뭄으로 펄썩거리는 먼지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비온 뒤의 맑고 청량한 공기와 푸른 하늘이 또 기다려졌기 때문일겁니다.

 

그래도 이 비 때문에 혹시 생업에 지장 있거나 곤경에 처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너무 좋아만 하는 거 아닐까?’ 한쪽으로 살짝 미안하고 염려도 되었습니다. 어느새 짚신장수 아들과 우산장수 아들을 둔 어미의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제 나름대로 그 딜레마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해 뜨는 날은 짚신장수 아들로 기뻐하고 비오는 날은 우산장수 아들을 위해 기뻐할 것

 

이것이 제가 묵상한 결론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나쁘지 않은 하늘의 축복이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작정을 했지요.

 

문득 내가 쏟아지는 비를 이리 반기고 좋아하게 된 이유가 생각났습니다. 그건 바로 직전에 더위와 메마른 갈증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배가 많이 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 한그릇과,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 한 컵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습니까. 배부른 사람, 넉넉했던 사람은 도무지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요. 비가 석달 열흘쯤 오는 중에 내린 비라면 지겨웠을 수도 있고요.

 

제 아내는 오랜 난치병 질병으로 좀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지요. 7년째, 그러니 본인이나 돌보는 저나 그 후유증을 같이 고스란히 겪고 있는 아이들이나 자주 괴롭지요. 그런데 그 사이로 종종은 통증이 없을 때도 있고 기쁜 소식이나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으로 아픈 중임을 까맣게 잊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있습니다. 정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상황이지요. 그때는 건강한 이들이 느끼는 행복이나 감사보다 두 배, 세 배는 큰 부피로 감동을 합니다.


 


갈말음악회 때 이종철선교사님이 선물로 주신 <병상에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축복>이라는 독일 기독교마리아자매회 창시자 바실레아 슐링크님의 작은 책자에 이런 귀한 말이 있더군요.

 

질병은 다른 고통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특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내 생애 가운데 병을 앓고 있던 기간에 대해 저는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간에 저는 연단을 받았고 정화되고 변화되었습니다. (‘위로와 축복’ 16p)

 

그렇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귀한 것을 얻는데 지불하는 비싼 댓가입니다. 세상에는 아무 것도 공짜가 없으며, 거저 생긴 것에는 우리는 소중한 마음이 생기지도 않고 귀하게 보관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왜 질병에만 국한되겠습니까. 사업의 실패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또는 억울한 누명으로 괴로운 사람 등 모든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그 모든 고난들은 바로 문들 일지도 모릅니다. 그 문의 바깥에 주님이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상황으로 온 문들을 열고 주님을 만나면 먹고 마시며 기쁨의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꽁꽁 닫고 방에서 웅크리고 살게 되면 우리는 그런 귀한 것을 얻는데 다다르지 못하고 정말 고통만이 고스란히 안고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다른 문을 가졌습니다. 그 닫힌 문 안에서 분리되고 괴롭기도 합니다. 저와 우리 가족에게도 육중한 질병의 문이 닫고 있습니다. 그 문을 빼곰이라도 열고 버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문밖에 계씬 주님이 그 문을 한 번에 열어버릴 힘이 없어서 두드리고 계시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단지 안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만나고 싶어하며, 그러기 위해 스스로 열어주기를 바라십니다.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어떤 위로도 함께 먹고 마시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귀하고 진정 가치 있는 자는 역경과 슬픔으로 시련을 받으나, 다만 이 길을 통해 천국의 목적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위로와 축복’ 2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