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루터는 그 청년을 수도원의 마당으로 데려와 땅을 직접파고 묻어주면서 영혼을 부탁한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부모를 향해서 위로를 해주면서 그런다.
"고통과 죄가 있는 곳에 주님이 없다면 말이 안됩니다. 주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만일 이 일로 내가 지옥에 간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주님은 그곳에 계실거라고, 함께 하실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면죄부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인채로 평생을 손가락질 받고 수모를 당하며 살아야했다. 먼 옛날 예수님이 오시기전 이스라엘처럼 중세기도...
가난하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되었고, 그걸 벗어나려면 도 면죄부나 기부를 해야하지만 그럴 힘이 있었다면 죄를 짖지도 않았을 사람들이라 불가능했다.
그런 불합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원천적으로 왜곡해서 모순이 되게하는 종교의 부패를 마틴루터는꾸짖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고통을 달래주고 함게하는 길이 죄라면 지옥이라도 갈 수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이런 각오는 루터가 처음이 아니었다. 사도바울도 이미 그랬었다. 자신은 끊어질지라도 동족과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감수하겠다고 했다. (로마서9장 초반)
고통받는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어디든, 어떤 불이익도 감당하겠다는 참 신앙은 예수를 그대로 닮았다.
양지만, 안전하고 충분한 곳만 찾아서 신앙의 고백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 더 나가서 그러기를 위해 끝없이 기도하고, 그런 모습에 축복이라는 표현을 마구 하면서 더 부추기는 종교의 흐름속에 놓여졌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버림받았다는 인식, 죄가 많은데 회개하지않아서라는 선고, 죽을 병에서 나음을 입지 않으면 신의 권능이 없는 교회, 성도로 낙인 찍히고 무엇인가 찜찜하고 감사가 없는 칙칙한 신자가 되어버리는 세태...
고난주간이 왜 있는걸까?
화려한 입성과 비단길, 승리의 환호만으로 가득찬 축제를 벌이는게 더 타당할텐데, 가끔은 표리가 부동한 개신교의 문화와 나도모르게 빠져드는 변질에 몸서리 쳐진다.
나는 지옥으로도 스스로 갈 수 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함께하심을 굳게 믿은 바울과 마틴루터를 따라야겠다. 이 고난주간과 십자가 부활을 묵상할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