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날마다 한 생각

습관성 기억상실증, 그 아픔과 고마움

희망으로 2012. 11. 2. 09:36

<기억상실증, 그 아픔과 고마움>

 

아침 티비에 휠체어를 탄 아빠를 밀면서 산책하는 딸의 이야기가 나왔다.

잠시 앉아 쉬면서 딸이 물었다.

 

아빠 어릴 때 나와 지내던 일 기억나는 것 있어?”

그럼, 실뜨기!”

! 그래 맞아, 같이 실뜨기를 하면서 놀았지!”

... 너 학교 갈 때 잘 다녀와! 하고 말하던거,”

“.......”

그리고 너 엄마, ”

 

아마 어릴 때 엄마가 아이와 남편을 두고 어딘가로 가버린 듯 했다.

안보고 싶은 데, 그래도 한 번은 찾아서 마음의 정리를 해야만 편할 것 같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25년을 엄마 없이 보낸 설음과 원망이 몰려오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내내 미루는 게 더 힘들다며 흐느끼는 그 딸,

 

그 아빠는 무슨 병인지, 어떤 상태인지는 미처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온전한 기억은 못하는 상태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딸과의 아주 오래전 실뜨기 놀이를 하던 기억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았다.

왜 어떤 기억들은 사라지고 흐려지는데 그 기억은 묻자마자 나올 정도로 잘 남았을까?

 

딸도 엄마에 대한 기억, 어쩌면 구체적이기보다는 슬픔이나 아픔으로 남았을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기억 장소가 다를 것 같았다. 머릿속 어딘가가 아니고 가슴속 어딘가...

 

사람들은 어떤 일들을 머릿속이나 가슴속 어딘가에 담아서 기억한다.

시간 장소 내용, 혹은 결과에 대한 나름의 평가까지 곁들이기도 하고,

대개 그런 것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의무적인, 혹은 사무적인 보관용처럼 담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조금 다른 형태로 객관적이기보다는 더 주관적으로 담는다.

장소도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속에,

그것들은 뜨겁고 차갑고, 아프고 기쁘고, 물컹거리고 포근하고...

내용도 원인도 사라지고 때론 단지 결과적인 감각만으로 남기도하고 아예 감정도 없는

무의식처럼 캄캄하고 공기처럼 무형체로 담고 있기도 하다.

 

보통 살던 모습과 180도 달라져버린 병원숙식생활을 시작하면서 참 많은 기억들이 남았다.

어딘가 보고해야할 보고서처럼 숫자와 단어, 이름들이 빼곡한 기억도 있고,

돌아보면 내용은 기억도 안나면서 눈물만 범벅인 기억도 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답답한 느낌만 남는 기억들도 있다.

 

어떻게 저 순간들마다 넘기고 살아남았을까?

참 모질고 독하다, 고난보다 더 질기고 독한 게 사람인가 보다...‘

 

최근에도 여전히 크고 작은 기억거리들이 일어난다.

왜 안 그럴까, 목숨 붙은 생명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연속인데...

더구나 얼마 전 딸 아이의 입학시험 낙방과 더불어 내 처지가 한심하고 속상해서 좀 많이 힘들었던 기억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루를 산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덜 기억할수록, 오래 기억하지 않을수록 때론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도 한다.

우리도 대부분 단 삼일도 못 넘길 것 같던 힘든 기억도 세월과 함께 지운다.

내용은 기억해도 감정은 흐려지고 씻어내는 망각의 치료법이라고 해야하나?

안 그럼 어떻게 살까.

 

요즘 내가 예전보다 건망증이 심해진다고 나도 남도 인정한다. 그럴거다.

나는 날마다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지우려고 의도적으로 애쓰며 몇 년을 살았다.

안 좋은 걱정거리, 안 좋은 상한 감정의 일들을 지우고 또 지우며 산다.

몇 시간씩 노래를 듣거나, 재미있는 영화, 폭소를 부르는 웃기는 코미디 방송을 보기도하고,

몸이 지치도록 걷고 또 걸어서 싹! 날려버리지는 못해도 상당부분 덜어내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는 것들은 글로 쓰고 하나님께 푸념도 하면서 또 지운다.

남은 건 애꿎은 아내에게 수다인지 고문인지 모를 정도로 해대곤 지운다.

그래야 새 걱정거리, 새 고민과 속상할 일들이 그 자리에 들어올 테니...

 

잘 지워서 비워야 인생이 행복해진다.

옆에 사는 사람도 쌓여서 일그러지는 얼굴 안 보면서 살 수 있을 테니

나만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의 행복도 달려 있다. 얼마나 잘 지우면서 사느냐에...

선별해서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서 기억하는 건 정말 귀한 능력이다.

그런데도 그게 잘 안 되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나도 마찬가지고,

 

최후의 기억삭제 수단은 하나님께 넘기는 거다.

더구나 원치 않는데도 닥친 일, 아무리 애써도 흔적 없이 지워지지 않는 일들은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다.

그거 계속 붙잡고 씨름하며 원인 찾고 해결책 찾느라 머리든 가슴이든 담아 놓으면

도저히 내일, 그 다음 날 살기 힘들다.

한계가 있는 저장용량과 소화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꾸 담으면 터지는 법이다.

 

많이 무거워서 혼자는 하나님께로 보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한다.

부끄러워말고, 자존심 내세우지말고 요청해야 한다.

중보기도와 위로와, 필요하다면 구체적인 손길까지도...

그러라고 하나님이 이 지구에 많은 사람들을 이웃으로 보내 놓으신거다.

서로 남의 짐을 지라!’고 말하셨다던가?

 

오늘도 나는 어제 생긴 일을 밤새 지우고 새 아침을 시작한다.

또 무슨 별 남길 필요 없는 일들이 줄을 서서 나를 기달리거다.

안그러면 얼마나 땡 잡는 날이겠냐만 그런 날 흔치는 않더라.

그냥 지울 거 지우면서 사는 수밖에~~ 각자의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