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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친구를 위한 기도...

희망으로 2012. 7. 14. 11:40

친구, 친구를 위한 기도...

 

인디언 말에 친구’란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고용에 의한 노동이나 계산에 따른 투자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행동, 무거운 짐을 나누거나 교대로 지고 친구의 가쁜 숨이 편안해지는 걸 보면서 기뻐하는 그런 마음일겁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더 잘하게 되는 것은 ‘재주’일 경우가 많고, 남의 유익을 위해 더 잘하려고 할 때 생기는 것은 ‘지혜’일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친구가 되려면 재주보다 지혜가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습니다)를 마치지 못하고 졸업을 한 학기 남긴 6학년 여름방학 종합식날 시골에서 서울로 온가족이 이사를 하는 바람에 공중에 붕 뜨고 말았습니다. 다니던 학교는 졸업자 명단에도 못 들어가고 동창회도 못가는 번외 친구가 되고 새 학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검정고시를 보는 바람에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처럼 소외되었습니다.

 

36년을 그렇게 모임도 못가고 얼굴도 못보고 이름조차 잊어먹으며 바쁘게 살다가 옛 친구들이 찾는 바람에 연락이 되었습니다. 2008년 4월 36년 만에 야외모임에 처음으로 가서 반갑게, 정말 죽어다 돌아온 친구처럼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5월에 닥친 아내의 급작스런 희귀난치병이 심해지면서 그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같은 그 2008년 5월에 막내 딸 아이의 양궁대회 전국 금메달을 축하한다면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보내왔습니다. 후원금이나 축하금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잘 키우라는 편지와 함께! 그러나 태풍을 맞은 듯 가정이 절딴 났습니다.

 

그럼에도 이후의 투병으로 추락해버린 우리에게 36년 동안에 딱 한 번 만난 나를 위해 모금을 해주었고, 어느 친구는 나의 간병에세이 책을 5권 주문하면서 100만원 가까운 돈을 보내왔습니다. 많이 친했던 한 친구는 어느 성탄절 날 늦은 밤 시간에 전화를 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통장번호를 물었고 적지 않은 돈을 보내왔습니다.

 

사실 내게는 돌려받을 무슨 건덕지가 남지 않았습니다. 이자는 고사하고 다른 청탁도, 감자 한 박스라도 보내줄 전망도 없는 완전 밑 빠진 독과 같은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아무 계산도 조건도 없이 건네주는 초등학교 동창들의 마음을 뜨거운 눈시울로 받았습니다. ‘아.. 친구란 이런 건가보다’ 하면서...

 

성경에도 밤중에 먼 길에서 돌아온 배고픈 친구를 위해 잠든 이웃을 깨워 기어이 먹을 것을 구해오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만약 자신을 위해 그렇게 했다면 그 행동은 이기적이고 무례하며 남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같은 겉모습도 동기와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기도는 그렇게 나 아닌 다른 이의 필요를 위해서 떼쓰듯 강하게 하늘에 요청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남을 위한 강청의 기도...

 

총각 때 실직하여 돈도 떨어지고 당연히 쌀도 떨어진 적 있습니다. 월세도 두 달이나 밀려 안집 주인을 마주치지 않으려 출입도 힘들게 했었습니다. 80년대 서울 변두리 상계동이라는 지역은 그게 흔한 모습이고 누구나 겪는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3일을 굶으면서도 남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못했습니다. 그러나 몸도 아프고 형편이 어려워 심하게 곤란을 겪는 같은 청년부 친구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해야 했을 때 서먹한 분들에겐 거지보다 더 손을 벌려 구했고, 좀 친한 분들에겐 강도처럼 빼앗다시피 했습니다. 이상하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가끔 부끄럽거나 수치스럽다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서라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마칠 때 자신을 위해서는 십 원짜리 동전하나 못 가져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연한 여분은 낭비입니다. 더구나 그걸 위해 더 소중한 것들, 시간이나 가족을 잃는 삶을 산다면 더더욱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