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520D 유감...
며칠 전 신문에 요즘 강남, 주부층에 BMW 520D모델이 유행이라고 기사가 나왔다.
심지어 인터넷에서는 최근 수입차 100대중 8대가 이 모델이라고도 나오고, 가격이 6300만원대인데 이전 다른 모델보다 500만원이나 싸서 인기가 좋다고 한다. 그러니까 다른 모델이 6800만원인데 500만원이나 저렴하고도 디자인이나 실용성은 더 좋고, 연비도 뛰어나다고 한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집이 가진 차는 13년 된 LPG차이고 그 할인가격 500만원의 반도 못주고 산 중고차였다는 비굘르 불허하는 사실이 씁쓸해졌다. 난 원래 차에 욕심도 없고 지금 내게 돈이 그만큼 있고 살 형편이 되어도 다른데 쓸 것이 뻔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한 구석이 비참해지는 이 심정은 왜 일까? 어쩌면 그걸 살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오는 자괴감일거다.
지금 병실에서 틈틈이 읽는 책 중에 스페인 산티아고 870KM 순례길을 네 번이나 다녀오신 분이 쓴 책이 있다. 화가이시면서 스페인에 5년 가까이 살기도 하셨던 분, 그 오가는 와중에 스페인어 영어를 사용하시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5권의 책으로 내셨다. 그 첫 번째 책인 ‘아름다운 고행 산티아고순례기’라는 직접그린 그림과 글만 담긴 작은 소책자를 본 뒤 나는 아내와 같이 유일하게 노후에 할 계획으로 그 길을 가자고 다짐하게 했던 동기가 된 책이다.
그런데 난 그 꿈을 실행해보기 힘든 처지에 빠졌다. 아내는 희귀난치병에 걸려 병실에서 화장실까지도 걸어가지 못할 사지마비환자가 되었고 5년째, 이젠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을지 불안할 만큼 병원을 떠도는 사이 경제적 신체적 상황이 바닥났다. 게다가 난 스페인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못하고, 그림도 못 그린다. 너무 부럽고 너무 한 숨이 나온다. 난 이게 뭐냐고 한심하고 답답해서... 참 나, 한 달 두 달을 걸어서 근 900키로를 걷는 게 뭔 사치도 아니고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묻힌 성지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순례를 하겠다는데도...
한 숨이 나오고 우울한 심사가 길어지다가 문득 생각의 타임머신을 타본다. 십년 뒤, 백년 뒤로! 신기하다. 아무도 없다. 그렇게 부럽던 BMW520D 자동차도 없고, 그걸 타고 자랑스럽게 웃던 강남 주부들도 다 사라졌다. 이 땅위에서는 흔적이 없다. 부럽던 순례자도 사라지고 능숙한 외국어도 사라지고 그 분이 운영하며 서로를 기억하며 기뻐하던 카페도 사라졌다. 그렇게 세월은 모든 것을 이 땅에서 소멸시켰다. 누군가의 기억이나 고물 같은 물건으로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생생한 값어치는 다 사라졌다.
나는 있을까? 나도 없다. 나의 존재도, 내가 아끼던 물건도 사라지고, 지금은 꽤 칭찬받을만 했던 열심도 선행도 다 사라지고 몇몇은 알아주는 듯 했던 잔 재주들도 다 사라져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백년쯤 더 지나면? 오백년쯤 더 지나면?? 그야말로 기억에서조차 없어질 것이다. 무슨 대단한 유물이나 작품을 남겼다한들 그건 그걸 값지게 보는 사람들의 가치일뿐이지 정작 나하고는 아무 영향도 주고 받지 못하는 남의 상황일 뿐이다. 마치 천년쯤 전인 신라의 경주 어딘가에서 실권을 쥔 왕이 속국이 된 어떤 사람들을 쥐잡듯 했는지, 패자들이 목숨연명하며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져버린 것 처럼!
그럼 도대체 왜 나는 이 땅을 사는 동안, 혹은 오늘 하루를 이렇게 고단하게 살아야 하는걸까? 안팎으로 쥐어박히거나 스스로 속을 긁어가면서 말이다. 아님 부러워 죽을지경을 참거나 무언가를 좀 더 늘리기 위해서 죽을 똥 살 똥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걸까? 누군가와 사이가 좋았다 안좋았다를 반복하며 신물을 위장으로 올리고 내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살생과 도적질, 속에 담고 안 들키는 대단해 보이는 금욕을 한들 그게 그 고통이지 뭐가 다를까? 한 백년쯤 지나서보면 오십 보 백 보 같은 별 다름 없는 행태들...
가장 좋은 오늘 이 세상을 하직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미루며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뭔가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한숨 쉬는 대부분의 사람들, 대부분의 이유는 사실 이 땅에 사는 동안만 존재하고 부러움 받는 것들로 인함이다. 무슨 거룩한 다음 생의 뿌리로 고통을 참으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도 따져보니 거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대상들, 물건들이고, 심지어 고상하다고 포장하고 부여한 사랑의 행위조차 수두룩 정말 내 중심 포장이라 서글프다.
가져가지도 못하고 영원히 남기지도 못할 것들을 위해 바둥거리다 살기 싫다. 그걸 빼고도 이 땅에 사는 동안 김 빠지지않게 살 이유를 찾고 싶다. 오늘 하루를 허무와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살게 할 이유를 찾고 싶다.
내가 경험한 사실을 근거로 더듬어보니 예수님은 2천년이나 전에 왔다 가셨다. 시간상으론 그렇고 공간상으로도 이 나라도 아니고 먼 이스라엘 땅에 왔다 가셨다. 그럼에도 내가 허덕이는 힘든 순간마다, 사람에 치이고 자잘한 하루치 운명에 쓸릴 때마다 내게 힘을 주신건 확실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시간도 공간도 멀고 먼 곳에 존재했던 분의 삶이... 그 길을 따라 살다간 제자들의 삶도 비슷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 실시간 이 순간들에!
한가지 결론에 다다른다. 그 모두는 자신을 위해서, 자기 것만 챙기다 간 사람이 아니라는 점, 그런 삶은 모두 바람따라 먼지처럼 소멸한다. 누가 애써 남의 이기적 삶을 기려준다고!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자기를 위해, 자기 것만 챙기다 죽어간 삶이 아니었다. 남을 위해, 그것도 세상 사는데 필요한 몸뚱이와 또 다른 욕심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 깨끗하고 남에게 유익한 생을 살도록 도와주다가 가셨다. 그러니 유전되고 옮겨져서 오늘 나까지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 같다.
나만을 위한 것, BMW520D 차는 나를 위한 것이겠지. 유창한 외국어와 재능들, 누군가에게 자랑 받는 삶 또한 자기를 위한 것일 가능성이 많겠지. 남들에게 명예를 얻는 것도 그럴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시간 물질을 사용하는 것, 그게 가족이거나 자녀라도 그 내용이 단지 그들의 욕심을 채우는 방식이라면 자기를 위한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또한 그들의 진정으로 살아야할 귀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게 아니라면...
단지 참고 살기엔 너무 힘들고 긴 생이다. 남의 눈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기에도 평안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 교묘하고 지독한 끈적거리는 눈앞의 욕망은 왜 그리 강한지... 종일토록 내 모가지와 발목을 잡아 질질 끌고 다니는 허망한 욕구와 절망감들,
그 사이를 뚫고 나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평안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기위해서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소음과 방해는 너무도 많고 강하다. 자칫하면 나도 모르게 끌려가고, 떠내려 간만큼 또 허무한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꺼이꺼이 울거나 무언가를 향해 잘못된 분노를 씩씩거리며 애매한 화풀이를 할 것이다. 성경까지 들먹인 온갖 처세술과 합리화 탈을 쓴 달콤함들이 교회안까지 침범한 것 같다. 표준적인 기독교인의 스타일로 살아도 몰려오는 불안과 슬픔, 원망과 패배감이 자주 생기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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