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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기도 17 - 내탓일까요? 니탓일까요?

희망으로 2022. 6. 30. 23:37

그저 기도 17 - 내탓일까요? 니탓일까요?

“야! 너 빨리 회개하래”
“내가 아니고 너에게 한 말인데?”

청년때 교회에서 이렇게 예배중 성경본문을 들으면서 킥킥거리며 친구와 그 지목대상을 떠넘기며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불경죄에 들어갈지 몰라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도 좋은 말이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나오면 서로 너에게 주는 말이라며 자기는 빠져나가곤 하며 놀았습니다. 적어도 딴 곳에 정신 팔지않고 집중은 하고 있었으니 하나님도 용서를 하시겠지요?

훌륭한 성서의 가르침이나 성인, 철학자의 명언이 차고 넘치게 많은데 비해 세상이 그 효과가 미미하고 잘 고쳐지지 않는 이유중 하나는 분명 이런 상대방에게 향해 하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까닭도 있을겁니다.

세례요한의 독설을 자신들에게 주는 하늘의 경고나 지적이라고 그 시대 엘리트 리더나 종교지도자들이 받아들였다면 예수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세상은 벌써 이 땅의 천국을 절반은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십계명을 몽땅 너에게 주는 법이라 강요하고, 어긴 벌도 다 너에게 하는 말이라며 우리 자신은 잘 지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지킬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그걸 고스란히 문책을 한다면 살아 남을 사람이 없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종교 성직자나 법정의 판사인들 남들에게 내리는 정죄를 곧이 곧대로 엄격하게 자신에게 향한다면 그들도 멀쩡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들은 아무도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오늘 세상의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나 법을 집행하는 검사 경찰 집단들이 숱하게 남의 자유를 구속하고 죄를 고지하는 그대로 100% 칼날을 자신들에게도 들이댄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날겁니다. 보복정치도 사라지고 법을 악용한 부정부패도 엄청나게 적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칼날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리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인정하기에 그런 농담에 실어 장난도 치고 화두로 삼았습니다. 그나마 청년시절의 순수함이 존재하던 상태라 가능했지만 나이들어갈수록 장난조차 입에 올리지 않게 됩니다. 그만큼 민망히 여기거나 아니면 한편 오랜 세월 습관처럼 무디어져버린 탓입니다.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 종종 부모라는 이유하나로 자기들은 권위적이고 언행일치를 못하면서도 저녀들에게는 옳은 말, 너그러움 없는 잣대를 들이대며 문책하기도 합니다. 용서도 자비도 베풀지 못하며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녀에게 강요하는 멋진 말대로 그대로 부모가 살아내기만 한다면 아마 훌륭한 부모로 존경을 받을겁니다.

그래서 일본 속담에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훈련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무엇을 지키게 하려면 자신이 찔리고 양심에 걸리니 고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혹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면 부모가 먼저 스스로 지키는 본을 보여야 한다는 순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권위와 존경심을 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어떤 훌륭한 말도 성경의 진리도 그 힘을 잃고 빛이 바래집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는 말이나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도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지적도 방향을 잘 정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남을 향해서만 적용하지말고 자신을 향해서도 적용하라는…

그러고보니… 진작부터 안시켜도 잘하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남을 향해 하라는 말인데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 죄는 일곱 곱하기 일흔번이라도 합니다. 무엇이든 용서하고 또 하고, 반복해 잘못을 저질러도 또 용서하고… 그거야말로 나 아닌 남에게 베풀어야하는 규율이고 자비인데 이건 반대로 하는 거지요.

바라기는 약해빠지고 약삭바른 인성의 사람일지라도 그 십분의일, 일곱번에 한번쯤은 자녀의 실수도 용서하고 직장동료나 친구의 잘못도 용서하는 구색은 갖추고 살수있기를 빌어봅니다. 명색이 사십년도 넘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는데 최서한 그 정도 균형은 잡고 방향을 제대로 어떤 것은 나에게, 어떤 것은 남에게 적용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문제나 책임은 온통 남에게만 떠넘기고 자신들은 변명하는 현상을 고치려고 카톨릭에서 벌인 운동이었지요? ‘내탓이오! ’ 운동이 그랬습니다. 세상의 문제나 원인에 내탓이오! 라는 자세로 사회를 바꾸어보자는 취지였지요.

그런데 ‘탓’아라는 단어가 어쩐지 좀 부정적 느낌으로 사용되어서 그런지 어감이 자꾸 걸렸습니다. ‘나부터!’라고 했으면 어떨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긴 워낙 말을 잘 오염시키는 인간의 본성이 그 말인들 내버려두었을까요? 맛난 것도 나부터! 좋은 물건도 나부터! 높은 자리도 나부터! … 그러면 다시 세상이 망쪼가 나는거지요.

결국 말은 완전한 해답이 못됩니다. 말의 바탕인 뜻을 헤아려야 하지만 그 뜻도 제각각일수 있으니… 어쩌면 뜻의 본질이며 그 모델인 예수님을 잣대삼아 묵상하며 살아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