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함박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

희망으로 2020. 12. 13. 11:29

 

 

 

<함박눈이 내리면 생각나는 그 사람>

 

아침부터 제대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많은 눈이 온다.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는 아내를 위해 눈오는 장면을 찍어 보여주었다.

(병원 구조가 다른 건물이 창을 가려 바깥이 잘 안보인다 ㅠ)

누군가 함박눈을 낭만과 불편의 이중 감정을 부르는 실체라 했다.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효과와 운전으로 밥을 먹고 사는 이들에게

여러 불편과 위험을 불러오는 반갑지 않은 감정을 동시에 일으킨다며.

눈이 오고 나면 대개 다음날은 심한 추위가 오기도 한다.

땅의 복사열을 차단하기 때문에 따라오는 자연현상이라고 한다.

또 한편으론 불편과 위험에 따라오는 사회적 현실 현상도 맞다.

 

그때 겨울에도 눈이 참 많이 왔다.

총각으로 지내면서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연명하던 때

아무 일이나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겨울에 한 사람이 교회에 왔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이전에 잠깐 다녔던 교회라고 복귀한 셈이었다.

가을에는 교회 종탑아래 공간에 자리깔고 지냈지만 엄동설한 겨울이 오고

난방이 불가능한 세멘 계단위 좁은 공간은 더 이상 지낼 수 없었다.

갈 곳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진 마당이라 나 혼자 사는 자취방에 

같이 지내면 안되겠냐고 어느 집사님이 부탁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 친구는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면서 쥐꼬리만한 군대서 모은 돈을

모두 교회에 헌금으로 내었던가? 하여간 수중에 전혀 돈이 없었다.

 

난방겸 취사도구인 연탄불에 냄비밥을 해서 김치에 같이 먹고 지내다가 

어느날 이 친구가 나보고 같이 공사현장에 가자고 권유했다.

직장을 다닐 때 들어와 얹혀살던 친구가 이제는 역전되어 일도 없고

생활비도 떨어진 내게 자기가 다니던 공사현장을 가자는 말이었다.

그래서... 겨울 찬바람에도 새벽 버스를 타고 고층 아파트 현장을 갔다.

당시 신설동에 짓고 있는 건축현장은 겨울인데도 실내공사를 했다.

뼈대는 올라가고 창은 안달린 11층 높이 실내는 강풍에 추위가 엄청났다.

벽쪽으로 가면 골조만 올라간 높이가 아찔하고 내려다보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새벽 버스에서 떨고 돌아오는 저녁 버스에서는 고단해서 잠들었다.

한 달을 간신히 다니고 월급을 받은 날 그 돈은 유난히 크고 아깝고 그랬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돈에서 생활비라고 일부를 내놓고

나머지 전부를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교회에 냈다.

그 결심이 부럽기도하고 한편 공감이 잘 안가기도 했다.

지낼 곳 방세 낼 돈도 없어서 얹혀 살면서도 뭐가 그리 고맙다고 감사헌금을

통째로 교회에 내는건지 얼른 이해가 안되었다.

 

얼마 후 나는 다른 친구의 소개로 직장이 마련되어 수원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쥐꼬리만한 돈이지만 내게는 큰 돈이었던 방의 보증금을

뺄 수가 없었다. 나만 옮기는데 돈 한 푼 없는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방의 보증금은 물론이고 보잘것 없지만 세간살림 모두를 두고 가야했다.

곤로와 냄비까지 무엇 하나 못가져가고 옷만 작은 가방 하나에 담았다.

떠나기 전날 돼지고기를 사와서 김치찌개를 끓여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다.

잘 지내고 꼭 원하는 신학교를 가서 좋은 교역자가 되기를 빌어주었다.

그리고 뒤로 너무 먼 거리라 오가지 못하고 당시는 연락 방법도 없어

소식이 점점 뜸해지다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지금은 어디서 무었을 하며 살고 있을까? 정말 별났던 그 친구가 궁금하다.

 

그 후로 나는 수원에서 빚을 얻어 작은 방을 마련하고 밥은 사먹으면서

새 살림을 장만하며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닌 그 직장은 내 생애 처음으로 5년을 다닌 장기 직장이 되었다.

나보다 한이 맺혔던 아버지의 소원인 내 공부를 마쳤다.

부모님이 망쳐놓았던 학교생활을 검정고시로 다 마치고 대학까지 입학했다.

비록 생계와 직장때문에 방송통신대학을 갈 수밖에 없었지만...

무엇보다 잊지 못할 것은 그 직장에서 평생 반려자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나일론 지퍼가방 하나에 옷가지 몇개만 담고 모든 살림과 집보증금을 주고

수원으로 내려오던 첫날 밤은 복잡한 심정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이후 여러가지 내 문제를 풀어주신 결과를 보면 이자가 너무 많은 적금이었다.

추운 겨울 새벽 같이 아파트 공사현장을 출퇴근 하게 만든 하나님은 

아마도 내 마음이 옹졸하게 외면하지 못하도록 그 친구와 동행시킨 것 같다.

생존의 전쟁터를 같이 다니게 하면 결코 고개돌리고 외면 못하는 법이다.

잠시는 어처구니없고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이상한 결심이었지만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학업 직장 결혼 등의 진로를 다 풀어주셨다.

그렇게 애쓰고 죽도록(정말 죽음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던 공부 목표)해도

안풀리던 문제들이 내 노력이 아니고 주위의 도움과 만남으로 해결했으니

과학이나 투자 등 사람의 논리로는 잘 설명하기 힘든 결과로 왔다.

 

그 추운 날 느낌은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벽 없는 고층 아파트 실내에서 눈발이 날리는 날씨를 견디던 그 날들이.

가끔은 우리가 사는 처지가 한겨울 벌판에 얇은 옷 걸치고 버려진

불쌍한 고아같다고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미 한 번 겪고 넘어 본 그 스토리의 결과를 알기에 절망만 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긴 스토리의 뒤에 올 여러 결과와 대가, 위로들을 기대하며...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것’이라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약속과 음성이 믿어지는 동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