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오래된 기억 하나, 제발 꿈이기를...

희망으로 2020. 6. 14. 10:19

<오래된 기억 하나, 제발 꿈이기를...>

 

나에게는 거의 50년 정도 된 기억 하나가 질기게 자리잡고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문득 밤에 가위 눌리는 회상으로 나타나시도하고 때로는 벌건 대낮에도 떠오른다.

어쩌라고... 난감한 이 기억을 어떤 때는 사실이 아니야! 부정하기도 해보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내가 너무 어릴 때라 직접 본 것처럼 느껴서 그러는 것 뿐이야!

라고 둘러대며 바꾸려 해봤지만 잘 안된다. 거짓말... 한쪽에서 그러며.

 

이 이야기를 평생 아무에게도 안하고 살았다.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아내나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마치 무서움으로 현장을 도망간 비겁한 사람처럼 몰릴까 두려웠다.

오늘 길가에 누님이 과거 이야기를 한 글을 보고 또 호출이 되었다. 그 기억들이.

그러니까 지금 이 이야기는 거의 50년만에 처음 바깥으로 내놓는 거다.

좀 벗어나고 잊혀졌으면 간절한 심정으로. 마치 제를 지내는 바람으로...

 

내가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 3학년이나 4학년 쯤 이었을 초여름이었다.

친구들과 들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 하나를 목격하고 말았다.

시골을 달리는 아스팔트 신작로, 국도는 차가 자주 다니지 않는 대신 엄청 빨리 간다.

쌩~ 달리는 그 곁 인도를 가면서 막 빨려들어갈 것같은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다.

작은 산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작은 언덕길을 누군가가 리어카를 제동하며 내려오는데

리어카에 실린 거름인지 농산물인지 무게로 잘 세워지지 않았다.

거의 직각으로 앞에는 2차선 도로인데 그대로 차도로 달렸다.

하필 그 순간에 큰 트럭 하나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고 정말 수초도 안되는 찰나에

어...어...하는 소리가 있었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그 아저씨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잠시 후 쿵! 소리가 나고 끽~ 하는 길게 타이어 끌리는 소리로 모든 건 끝나고 말았다.

 

경주시 동방역 아래 큰 장터가 있었고 그 장터를 빙 둘러서 집들이 자리 잡았다.

어린 시절 태어나서 내내 그 장터 마당에서 십여년을 자란 나에게는 그곳이

바닥의 큰 돌 하나까지 알고 울타리의 나무가 몇개인지도 알 정도로 익숙한 곳이었다.

어느 날 그 공터 한쪽에 정말 방 두칸짜리 작은 집에 낯선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

나보다 3-4살 위의 중학생 형이 있었는데 이름이 최상국이었다.

그 위에 또 서너살 많은 누나가 한명 있었는데 이름이 분명히 기억 안난다.

최상희였던가? 확실하지가 않다.?

초딩에게 중학생형은 한참 두렵고 키큰 대상이었지만 도시에서 살다가 들어온

그 형은 신기한 물건도 많고 자상하게 여러가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업이 망하거나 피치못해 쪼그라져 시골로 온 가족이었던것 같다.

그 형의 엄마는 이집 저집 농사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기도하고 바느질도 했었다.

그래도 그 형과 누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멋진 모델들이었다. 우리에겐.

 

그런데... 그 사고를 직접 눈으로 본 몇 친구와 나는 무서워서 얼른 그 현장을 외면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란앉히며 식구들이 까닭모를 병든 아이가 되었다.

아무 말도 입에 올리지 않고 밥도 잘 먹지 못하면서...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공터에 낯선 모습을 보아야 했다.

운동화때 치는 그늘막 천막 같은 게 두어개 쳐있고 사람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만들어 마당에 놓인 상에 올리고 남자 아저씨들이 술을 마시고

간간히 곡하는 울음소리가 역 아래 그 공터를 가로지르며 울려퍼졌다.

“에고, 따해라... 살려고 애쓰던 집에 이게 우짠 날벼락이래 ㅠ”

“상국이니 엄마가 정신이 나가 실성한 사람처럼 울어대는데 딱해서 못보겠더라”

아주머니들 오가는 말을 들으며 힐끔 힐끔 보며 그 집을 멀리 돌아 집으로 갔다.

 

얼마 후 그 가족들을 다시 어디론가 이사를 나갔다는 말을 어른들을 통해 들었다.

상국이형은 한 번 마주친 우리들에게 책이랑 뭘 주었는데 기억이 안난다.

이사가면서 짐 정리를 하다가 못 가져갈 짐을 나눠 준 거 같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그 가족을 보기는 커녕 소식도 못 들었다.

그런데... 끝나지 않는 기억의 연결은 아직까지 내게 남아 나를 힘들게 한다.

그 날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망가듯 피해버린 자책감이 바닥에 숨었나보다.

그때 바위 하나가 몸을 누르는 듯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안 피하고 입 다물지 않았다고 한들?

그런데도 가끔씩 느닷없이 그 자책과 차와 사람이 충돌는 무서운 현장의 화면에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곤 한다.?

 

아냐, 난 그 현장에 없었어! 아마 전해들은 사고 현장의 이야기가 너무 생생하게

상상되어 마치 내가 직접 본 곳처럼 각인되어서 그런거야!?

내가 그 현장을 직접 보았다는 증거가 어디있어??

믿을만한 기억을 내놔봐!?

내 속에서 그런 반문이 나오면서 방어기제가 수십년을 작동하다보니

이제는 정말 진실이 무엇인지, 사실인지 상상인지 나조차 헷갈린다.

변함없는 건 그 순간의 사고로 그 형네 가족이 애쓰고 살려던 꿈이 박살나고

간신히 땅 조금을 마련해서 밝아지던 그 가족들의 의욕이 처참하게 사라졌다는

슬픈 인생의 연약함이다. 몸서리 쳐지게 딱 한번의 사고로 온 가족의 일생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이 생의 허무함을 어떻게 인정하며 살아갈수 있을까?

말도 안되는 교통사고 하나로 긴 삶이 바뀌어 버리는 허무한 반전 인생을...

 

아무에게 단 한 번도 털어놓지 못하고 담고 살아온 이 트라우마가 싫다.

이제 완전히 잊혀지고 떠났으면 좋겠는데 안된다.

천년만년 살 것 같고 욕망과 미움에 부글거릴 때는 약도 되지만...

 

하나님, 상국이네 가족에게 위로를 주셨기 바라고 비슷한 상처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같은 위로를 부탁합니다. 제게도 이제는 좀 잊고 잠들수 있는 자유를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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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4개

 희망으로 (2020.04.25 오전 11:39:02)  i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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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데... 한 35분이 걸렸다.
갈대님이 쓴 글을 시간 재보는 게 궁금해서 해보았다.
그만큼 내 속에 담겨있던 내용이라 그랬을까?
한번도 고치거나 수정도 없이 쭉 써내렸다.
얼마나 내게 깊이 여러번 새겨졌으면 그럴까 싶어
한편 마음이 무겁기도하다.
이제 말하고 털어놓았으니 좀 편해질까?
느닷없이 밤 꿈에만 안 나타나고 좋겠다 ㅠ

 희망으로 (2020.04.25 오전 11:46:35)  i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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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생각난 것 하나,
워낙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던 나에게
그 형은 어깨동무니 소년중앙이니 그런 만화책을
나에게 여러번 빌려주고 했었다.
시골에서는 귀한 책을 도시에서 살다온 집이라 가능했던거 같다.
식탁아래 몰래 보며 밥먹다가 아버지가 상을 엎을만큼
혼났던 기억도 있다.
그랬던 형네 가족들이라 더 맘에 새겨진걸까?

 venus (2020.04.25 오전 11:50:04)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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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님이 너무 어린나이에 큰 사고를 보신 트라우마가 잠재의식에 남아있는 듯 합니다.
그 누님과 형님이 의외로 고난과 역경을 잘 극복하고 잘 살고 게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힘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성냥불이나 라이터불을 제가 못켜는 것을 보고-천염염색 체험강사 시절, 가스불 점화를 제가 못하구요- 성냥에 불을 붙이면 던져버리곤 하더라구요.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무슨 트라우마가 있을까? 생각했더니,
초등시절에 소각장에서 불타던 비닐봉지가 날아와 손에 달라붙었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상처 치료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흉터가 거의 희미해서 잘 모르다가, 문득 흉터를 보고 기억을 했을 수도.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2:04:55)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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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계속 고향에 눌러 살았더라면
누구를 통해서라도 뒤에 소식을 들었겠지요.
저도 6학년 중간에 서울로 전학오면서 고향을 완전히 떠나버려서...ㅠ
슬픈 영화를 보고 나온 뒤의 느낌이 평생 따라오네요.

 민초 (2020.04.25 오전 11:50:43)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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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야 할 텐데요.
전 94년 8월10일 뺑소니로 당했던 입장으로
쇠를 심고 생활하는 지금도 날 궂이할때 통증 동반되곤 하면
분노가 치밀곤 합니다.~~
잊혀져야 할 텐데요.^*^
행복한 주말과 주일 맞이하세요.
늘 응원합니다.~~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2:06:15)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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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역할도 못하고
아무 도움도 못되었을 나이인데도
신고나 가족에게 알리지않고 외면했다는 자책감에...
죄값을 받는 심정이었네요.

 복음이 (2020.04.25 오전 11:58:51)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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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커는 상국이네 식구중 누구 였을까요??
저는 엄마한테 무차별 폭력 당하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요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2:07:30)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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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구인지 말 안했네요. 다시 읽어보니...
상국이 아버지였어요. ㅠ
그 얼굴의 잔상이 제게 남아있어요.
맞는지 아닌지 확인도 안되는 어떤 형상으로.

 닛시 (2020.04.25 오후 1:26:56)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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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했으면 쥐꼬리만한 보상이라도 받았겠죠.
그분들 위해 자주 기도하시면 혹시 해제해주실지도...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47:57)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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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출소도 없는 시골 농촌에서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어떻게 신고를 해요?
기껏 동네 어른들에게 뛰어가 알리는 정도일텐데
그것도 겁이나서 얼음땡이 되었으니...ㅠ
자꾸만 트럭과 리어카를 끌며 충돌하는 사람의 장면만 보여서 못견디겠어요.

 sea of glass (2020.04.25 오후 1:49:14)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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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님은 피해입은 입장에서 희망으로 님은 목격하신 입장에서,
그리고 어떤이는 피치 못할 또는 악의적 가해를 숨기고...
다들 평생 영향받는 부끄러움과 고통들이 있지요.
저도요.
잘 털어놓으셨어요.
무언가 저보다 또 한단계 더 올라가신 모습을 바라보는 느낌.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2:31:46)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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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 말해주시네요.
그런데 자꾸 기어 내려가는 기분은 왜 그러지요? ㅎㅎ
한단계 올라가는 거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그저 같은 높이에서 어울려 이 길 가기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오직 은혜로 (2020.04.25 오후 1:51:45)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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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
희망으로님은 어렸잖아요.
어려서 교통사고를 목격했으니 얼음이
되는건 당연해요.
신고 안 한 탓이 아니어요.
죄책감에서 그만 벗어나시길요.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2:29:59)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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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벗어나고 싶은데
생각하고 내 속 감정은 따로 노는가봅니다. ㅠ
마음처럼 안 사라지네요...
이제 말했으니 나아질지도 모르지요!

   오직 은혜로 (2020.04.25 오후 4:54:36)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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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맘때의 나에게 말해주세요.
괜찮아.. 네 탓 아냐.라고.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9:27:47)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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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정도하면 효과가 있을까요? ㅠ

 에바다 (2020.04.25 오후 5:29:45)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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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집사님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고 이후 그분들의 가족에게 지워질 삶의 무게를 지금은 알기에
그때의 그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고(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죠.ㅜㅜ) 강하게 각인되어
집사님의 지금 상황과 겹쳐지며 더 크게 다가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집사님은 그때의 얼어붙었던 본인의 모습이 잘못이 아닌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린 날의 기억을 이제는 놓아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9:29:45)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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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봐요
하루아침에 가장이 불행한 사고로 사라질 때
남은 가족들의 황당하고 슬픈 마음이 요즘은 더 와닿아서...
그런 사연을 안고 사는 분들의 이름만 들어도 누가 가슴을 때리는 듯
멍이 드는 기분입니다.

 새벽이슬 (2020.04.25 오후 9:14:52)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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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로 지우고 싶지요?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9:30:54)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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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우개 있으면 얼른 사고싶어요!
필요한 사람들이 많아서 대박나겠지요?
어디가면 구할수 있을까요...

 brokenreed (2020.04.26 오전 12:30:43)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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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아파하시길 기도합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희망으로 (2020.04.26 오전 1:34:29)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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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나타나서 무섭고 슬프게 합니다.
아무 준비도 안하고 있는데 이유도 없이...
이제 좀 덜해질것 같습니다.
아마 혼자 기억속에 숨겨놓는 바람에 더 그랬던 거 같아서요.
사고로 불행해지는 뉴스를 보면 남들보다 유난히 더 충격과 안타까워지는
저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괜찮다 세번씩이나 해주셔서 고맙네요.

 제임스박 (2020.04.26 오전 10:59:59)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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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울산가는 그 도로가 사고 제일 많이 나기로 유명한 살인도로 잘알려져 있죠.
저도 그 도로 자주 이용하는데 자주 사고 장면을 목격합니다.
참 위험한 도로라서 곳곳에 단속카메라가 있는데도 여전히 사고 위험은 높은 도로입니다 ㅠ

   희망으로 (2020.04.26 오후 6:10:37)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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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 당시에는 경주와 부산을 오가는 도로는 그 길 하나밖에 없었고
카메라 같은 것도 없을 때니 얼마나 위험한지...
차도 많지 않은 지방도로니 차들이 난폭 고속운전을 해대곤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