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하나, 제발 꿈이기를...>
나에게는 거의 50년 정도 된 기억 하나가 질기게 자리잡고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문득 밤에 가위 눌리는 회상으로 나타나시도하고 때로는 벌건 대낮에도 떠오른다. 어쩌라고... 난감한 이 기억을 어떤 때는 사실이 아니야! 부정하기도 해보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내가 너무 어릴 때라 직접 본 것처럼 느껴서 그러는 것 뿐이야! 라고 둘러대며 바꾸려 해봤지만 잘 안된다. 거짓말... 한쪽에서 그러며.
이 이야기를 평생 아무에게도 안하고 살았다.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아내나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마치 무서움으로 현장을 도망간 비겁한 사람처럼 몰릴까 두려웠다. 오늘 길가에 누님이 과거 이야기를 한 글을 보고 또 호출이 되었다. 그 기억들이. 그러니까 지금 이 이야기는 거의 50년만에 처음 바깥으로 내놓는 거다. 좀 벗어나고 잊혀졌으면 간절한 심정으로. 마치 제를 지내는 바람으로...
내가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 3학년이나 4학년 쯤 이었을 초여름이었다. 친구들과 들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 하나를 목격하고 말았다. 시골을 달리는 아스팔트 신작로, 국도는 차가 자주 다니지 않는 대신 엄청 빨리 간다. 쌩~ 달리는 그 곁 인도를 가면서 막 빨려들어갈 것같은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다. 작은 산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작은 언덕길을 누군가가 리어카를 제동하며 내려오는데 리어카에 실린 거름인지 농산물인지 무게로 잘 세워지지 않았다. 거의 직각으로 앞에는 2차선 도로인데 그대로 차도로 달렸다. 하필 그 순간에 큰 트럭 하나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고 정말 수초도 안되는 찰나에 어...어...하는 소리가 있었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그 아저씨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잠시 후 쿵! 소리가 나고 끽~ 하는 길게 타이어 끌리는 소리로 모든 건 끝나고 말았다.
경주시 동방역 아래 큰 장터가 있었고 그 장터를 빙 둘러서 집들이 자리 잡았다. 어린 시절 태어나서 내내 그 장터 마당에서 십여년을 자란 나에게는 그곳이 바닥의 큰 돌 하나까지 알고 울타리의 나무가 몇개인지도 알 정도로 익숙한 곳이었다. 어느 날 그 공터 한쪽에 정말 방 두칸짜리 작은 집에 낯선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 나보다 3-4살 위의 중학생 형이 있었는데 이름이 최상국이었다. 그 위에 또 서너살 많은 누나가 한명 있었는데 이름이 분명히 기억 안난다. 최상희였던가? 확실하지가 않다.? 초딩에게 중학생형은 한참 두렵고 키큰 대상이었지만 도시에서 살다가 들어온 그 형은 신기한 물건도 많고 자상하게 여러가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업이 망하거나 피치못해 쪼그라져 시골로 온 가족이었던것 같다. 그 형의 엄마는 이집 저집 농사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기도하고 바느질도 했었다. 그래도 그 형과 누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멋진 모델들이었다. 우리에겐.
그런데... 그 사고를 직접 눈으로 본 몇 친구와 나는 무서워서 얼른 그 현장을 외면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란앉히며 식구들이 까닭모를 병든 아이가 되었다. 아무 말도 입에 올리지 않고 밥도 잘 먹지 못하면서...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공터에 낯선 모습을 보아야 했다. 운동화때 치는 그늘막 천막 같은 게 두어개 쳐있고 사람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만들어 마당에 놓인 상에 올리고 남자 아저씨들이 술을 마시고 간간히 곡하는 울음소리가 역 아래 그 공터를 가로지르며 울려퍼졌다. “에고, 따해라... 살려고 애쓰던 집에 이게 우짠 날벼락이래 ㅠ” “상국이니 엄마가 정신이 나가 실성한 사람처럼 울어대는데 딱해서 못보겠더라” 아주머니들 오가는 말을 들으며 힐끔 힐끔 보며 그 집을 멀리 돌아 집으로 갔다.
얼마 후 그 가족들을 다시 어디론가 이사를 나갔다는 말을 어른들을 통해 들었다. 상국이형은 한 번 마주친 우리들에게 책이랑 뭘 주었는데 기억이 안난다. 이사가면서 짐 정리를 하다가 못 가져갈 짐을 나눠 준 거 같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그 가족을 보기는 커녕 소식도 못 들었다. 그런데... 끝나지 않는 기억의 연결은 아직까지 내게 남아 나를 힘들게 한다. 그 날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망가듯 피해버린 자책감이 바닥에 숨었나보다. 그때 바위 하나가 몸을 누르는 듯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안 피하고 입 다물지 않았다고 한들? 그런데도 가끔씩 느닷없이 그 자책과 차와 사람이 충돌는 무서운 현장의 화면에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곤 한다.?
아냐, 난 그 현장에 없었어! 아마 전해들은 사고 현장의 이야기가 너무 생생하게 상상되어 마치 내가 직접 본 곳처럼 각인되어서 그런거야!? 내가 그 현장을 직접 보았다는 증거가 어디있어?? 믿을만한 기억을 내놔봐!? 내 속에서 그런 반문이 나오면서 방어기제가 수십년을 작동하다보니 이제는 정말 진실이 무엇인지, 사실인지 상상인지 나조차 헷갈린다. 변함없는 건 그 순간의 사고로 그 형네 가족이 애쓰고 살려던 꿈이 박살나고 간신히 땅 조금을 마련해서 밝아지던 그 가족들의 의욕이 처참하게 사라졌다는 슬픈 인생의 연약함이다. 몸서리 쳐지게 딱 한번의 사고로 온 가족의 일생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이 생의 허무함을 어떻게 인정하며 살아갈수 있을까? 말도 안되는 교통사고 하나로 긴 삶이 바뀌어 버리는 허무한 반전 인생을...
아무에게 단 한 번도 털어놓지 못하고 담고 살아온 이 트라우마가 싫다. 이제 완전히 잊혀지고 떠났으면 좋겠는데 안된다. 천년만년 살 것 같고 욕망과 미움에 부글거릴 때는 약도 되지만...
하나님, 상국이네 가족에게 위로를 주셨기 바라고 비슷한 상처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같은 위로를 부탁합니다. 제게도 이제는 좀 잊고 잠들수 있는 자유를 주세요! 아멘! ip : 175.223.38.32 |
댓글 24개
희망으로 (2020.04.25 오전 11:39:02) iph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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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데... 한 35분이 걸렸다. |
희망으로 (2020.04.25 오전 11:46:35) iph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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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생각난 것 하나, |
venus (2020.04.25 오전 11:50:04)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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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님이 너무 어린나이에 큰 사고를 보신 트라우마가 잠재의식에 남아있는 듯 합니다.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2:04:55)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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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계속 고향에 눌러 살았더라면 |
민초 (2020.04.25 오전 11:50:43)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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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야 할 텐데요.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2:06:15)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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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역할도 못하고 |
복음이 (2020.04.25 오전 11:58:51) andro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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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커는 상국이네 식구중 누구 였을까요??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2:07:30)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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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구인지 말 안했네요. 다시 읽어보니... |
닛시 (2020.04.25 오후 1:26:56) andro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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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했으면 쥐꼬리만한 보상이라도 받았겠죠.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1:47:57)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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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출소도 없는 시골 농촌에서 |
sea of glass (2020.04.25 오후 1:49:14) andro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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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님은 피해입은 입장에서 희망으로 님은 목격하신 입장에서,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2:31:46)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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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 말해주시네요. |
오직 은혜로 (2020.04.25 오후 1:51:45) andro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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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2:29:59)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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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
오직 은혜로 (2020.04.25 오후 4:54:36) andro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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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맘때의 나에게 말해주세요.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9:27:47)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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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정도하면 효과가 있을까요? ㅠ |
에바다 (2020.04.25 오후 5:29:45)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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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집사님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고 이후 그분들의 가족에게 지워질 삶의 무게를 지금은 알기에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9:29:45)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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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봐요 |
새벽이슬 (2020.04.25 오후 9:14:52) andro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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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로 지우고 싶지요? |
희망으로 (2020.04.25 오후 9:30:54)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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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우개 있으면 얼른 사고싶어요! |
brokenreed (2020.04.26 오전 12:30:43)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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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아파하시길 기도합니다. |
희망으로 (2020.04.26 오전 1:34:29)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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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나타나서 무섭고 슬프게 합니다. |
제임스박 (2020.04.26 오전 10:59:59) andro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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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울산가는 그 도로가 사고 제일 많이 나기로 유명한 살인도로 잘알려져 있죠. |
희망으로 (2020.04.26 오후 6:10:37) 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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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 당시에는 경주와 부산을 오가는 도로는 그 길 하나밖에 없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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