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하나님은 어떻게 멀쩡하실까?

희망으로 2017. 10. 7. 10:43

 





<하나님은 어떻게 멀쩡하실까?>

 

하나님은 도대체 얼마나 잔인하신 걸까?

얼마나 냉정하셔야 수 천 년을 안 죽고 견디실 수 있으실까?

 

사랑의 지극함을 표현할 때 나 아닌 사람과 함께 웃고 울어주는 공감을 말하기도 한다. 가족이나 이웃의 슬픔과 기쁨을 같이 공감해서 같이 웃고 울어주는 것을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좋은 공동체 좋은 회사도 그런 가치를 앞세워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그렇게 하고도 건강하게 오래 견딜 수 있을까? 내 경험으론 그게 말이 안 된다. 뭔가 논리가 아니라 현실적 모순이 너무 뻔해서 못 믿겠다.

 

아내가 며칠 째 끼니마다 먹는 거라곤 딱 한 숟가락이다. 그것도 밥도 아니고 죽을. 약을 먹기 위해 이를 악물고 먹어 넘기는 거라 더는 못 먹는다. 그나마도 한 수저도 못 먹을 때에 비하면 고맙고 다행이다. 안 그러면 수액링거나 영양제를 또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죽 세 숟가락, 그걸로 사람이 제대로 견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투병을 해야 하는 에너지를?

 

그건 아내의 문제고... 또 하나의 문제는 그 상황에 계속 체력과 정신을 어느 정도 유지해야하는 보호자의 경우다. 전에는 아내가 밥을 못 먹을 때 나도 따라 굶었다. 내가 무슨 자비나 동참의 고상한 마음으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아쉽게도 아니다. 단지 그런 상황이면 따라오는 우울함과 분노와 식욕을 상실해서 그랬다. 주위 사람들이 그러다가 환자보다 보호자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밥 좀 먹으라고 많이 말렸다. 그 뒤로 조금씩 변했다. 살고 싶어서,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아내가 굶고 있는데도 그 순간에 그 앞에서 잔인하게도...

 

참 모순이다. 깊은 공감과 측은함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오래 견디려면 냉정하고 잔인해져야 한다는 얼핏 모순 같은 이 사실이 참 서글프지만 어쩌랴.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밥 먹고 잠 자고 평온을 유지하려면 최대한 남의 일처럼 거리를 유지해야하고 최소한 마음상태라도 그 비슷해야 한다. 안 그러면 빠른 시간 안에 병들고 슬퍼서 정작 환자보다 먼저 죽어갈 게 뻔하다.

 

예전에 한동안 자주 만나 뵈던 수도원의 수도자들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 처음에 몰랐던 것을 느꼈었다. 다친 강아지나 밟힌 풀꽃에도 눈물 글썽일 정도로 여리고 맑은 심성의 그분들이 잘 알던 사이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밥 먹고 잠자고 일상을 꾸준히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보통 사람들은 병들고 망하고 이별하면 더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이 통곡하고 좌절한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위로하고 도와주면서도 결코 자신들은 머리털하나 바람에 날리지 않을 정도로 일상을 유지했다. 물론 신앙의 바탕이 다르고 정신세계가 다른 이유에서 가능한 것도 있지만 평소 살붙이처럼 그들과 공감하며 보여준 기억을 기준으로 보면 전혀 딴판인 미스테리다. 하기는 그러지 않는다면 마더테레사가 캘거타의 죽음의 집같은 세상의 지옥 을 평생 어떻게 봉사하면서 견딜 수 있었을까. 날마다 공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면 진작 병들거나 우울증으로 죽어 나갔을 거다.

 

어떤 점에서는 세상도 그렇게 흘러가고 보통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산다. 어둡고 우울한 참상은 빨리 잊고 때론 멀리 밀어내며 외면하고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간다. 거의 본능에 가깝도록. 솔직히 감정은 그런 장면을 대하면 식욕 기쁨은 떨어지고 무거워져서 생기를 잃기가 십상이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곧잘 힘들고 어두운 이야기를 올리다가도 나는 자주 멈칫한다. 이 시도가 얼마나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불편하게 할지를 짐작하면서. 외면하고 멀리하지 못하면 안고 동감하며 지고 갈 심적 수고도 짐작하면서.

 

다시 돌아가서, 그런데... 나는 정말 잘 안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본래 냉정한 내 성품에도 불구하고 통증으로 신음하는 가족 곁에서 내 입에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다는 것이. 그러니 얼마나 더 잔인해야 흔들리지 않고 보호자로 버티며 가족을 돌볼 수 있을까? 그 기준으로 보면 오랜 세월을 중증 가족을 돌보며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한 걸까? 아주 작은 감정조차 알아차리고 깊이 공감 하면서도 내 생존과 감정, 생활을 일상처럼 유지해나간다는 상태가.

 

 

이쯤 되면...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이 가시관과 채찍에 피투성이가 되고 십자가에 손발 못 박혀 죽어갈 때, 하나님은 감정이입이나 동정심으로 힘들지 않으셨을까? 어떤 동물은 새끼가 죽는 것을 보면서 어미가 장이 끊어지는 단장의 흔적을 남겼다고도 하던데 하물며 사랑의 본질인 하나님이니.

 

더 심각한 것은 그게 어디 예수님의 경우 한 번 만 이 아니라는 것. 태초 이후로 끝없는 자신을 닮게 만든, 스스로 내 자녀들아! 라고 부르는 피조물 인간들의 고통과 죽음을 수 천 년을 지켜보며 감당해야 한다는 점. 하나님은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죽지 않는 신이기 때문이라면 그건 영원한 생명이 가히 축복이 아니다. 그건 신의 지옥을 부르는 불행이 아닐까? 죽을 만큼 힘들어도 결코 죽지 못하는...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밥 먹고 잠도 자고 다시 웃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얻은 걸까? 오늘 그 비결과 힘을 정말로 간절하게 구한다. 오늘 당장 필요해서! 날마다 필요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