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마주 앉아 따지는 ‘조삼모사’>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적용하는 비결 비슷한 열 가지 기준이 있다. ‘나의 행복 십계명’ 이랄까? 그 중의 몇 가지가 뭐 이런 거다. (누군가 무지막지한 도덕적 잣대로 공격할까봐 겁도 난다. 이게 뭐 대단한 철학적 주제도 아니고 심각하게 진지한 신앙고백도 아니며, 남에게 권하지는 않고 혼자 하는 생각이니 너무 나무라지 않으시면 좋겠다.) ‘내일 할 일을 오늘로 끌어 오지 마라!’ ‘지금 먹을 것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체면치레는 열 번에 한번, 실속은 아홉 번 챙긴다!’ ‘남들은 자기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내 생각을 한다!’ ‘잘하는 일보다 재미난 일부터 먼저 하자!’ 한 친구가 그랬다. “딱 까르페디엠이네!” ‘그런가?’ 맞더라. 그런 시각에서 보니 다 그렇다. 적당히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 기준이고 현실적 선택들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까르페디엠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한다. ‘지금을 즐겨라!’ 로, 큰 의미는 같지만 나는 세밀한 부분에서 조금 다르게 풀이한다. ‘오늘을 놓치지 말라!’로. 라틴어 ‘까르페’가 ‘즐기다’ 와 ‘잡다’라는 뜻이 있고, ‘디엠’이 ‘지금’, 혹은 ‘날’을 의미하는 때문이다. “그거 원숭이가 한 ‘조삼모사’와 뭐가 달라?” 또 다른 누가 약간 빈정대면서 놀렸다. ‘...내가 원숭이와 비슷하다고?’ 사람들은 이 원숭이의 ‘조삼모사’ 이야기를 하면서 낄낄 비웃고 손가락질하면서 원숭이들을 한 번 더 놀린다.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준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떼거지로 성질을 냈다. 그래서 얼른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하니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다고 해서 생긴 단어.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 속에는 원숭이를 욕할 수 없는 면들이 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 도 있고, 나중에 쇠고랑도 차고 감옥 가서 신세를 망칠 게 빤한데도 뇌물도 받고 속이고 횡령도 하는 범죄 뉴스들을 보면. 나중에 어찌될망정 당장 챙기고 누리고 저지르고... 이런 속성들이 원숭이가 좋아한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랑 뭐가 다를까? 하지만 나는 단언코 원숭이와 다르다. 비록 나의 행복하게 살기 위한 비결, 행복십계명이 비록 내일보다 오늘 행복하자! 남들보다 나를 먼저 챙겨서 더 즐겁게 살자! 라고 할지라도. 그 근거는 이렇다. 내가 행복십계명을 생활의 수칙이나 작은 비결쯤으로 애용하기는 하지만 그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의 발 앞에 펼쳐진 길을 잘 가기 위한요령 정도로 여길 뿐, 목적지나 방향 설정에 해당하는 그런 중요한 기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과학적이지 않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바나나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받는 쪽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른다. 속담에도 ‘초년고생은 돈 주고도 사서한다.’ 라거나 ‘고진감래’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등 비슷한 표현들이 참 많다. 그만큼 처음에는 고생해도 나중에 잘 되기를 바라는 심리들이 모두 있나보다. 시간적으로, 과학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는 불행과 행복,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하루의 절반씩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배치를 할까? 아마 대부분 처음에 나쁜 것을 배치하고 나중에 좋은 것을 순서로 맞이할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론적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경험해보아도 그랬다. 그 반복 속에서 내 감정의 미묘한 패턴을 보았다. 좋은 일 다음 안 좋은 일이 오면 더 힘들게 느껴지고 더 많은 원망이 쏟아지고, 반대로 무겁고 괴로운 일 다음에 좋은 일이 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지. 그래서 굶다가 죽 먹으면 다행이라며 기뻐하지만 밥 먹다가 죽 먹으면 망한 기분이 드는가 보다. 같은 죽을 먹으면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사실 삶은 하루 중에 딱 한 번씩만 그렇게 불행 행복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오가는 밀물썰물처럼 파도친다는 점이다. 그러면 앞뒤 순서가 구분이 없어진다. 마치 닭과 달걀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데 둘씩 묶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이 나누어진다. 행복 다음 불행으로 둘씩 묶어서 평생 되는 일이 없다며 늘 비관과 불평으로 사는 사람과, 불행 다음 행복 세트로 끊어서 힘든 중에도 늘 좋은 일이 생겨서 기운이 난다며 감사로 사는 사람으로. 인간들의 끝없는 논쟁 중 한가지인 닭과 달걀의 우선순위가 아직도 끝이 안났다던가? 과학적이고 누구나 수긍할만한 이론이 없다. 그랬다면 벌써 종지부를 찍었겠지만. 그냥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사실이고 정답이 된다. 비슷한 것이 또 있다. 보통 아침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와 달리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었던 성경 속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이렇게 사람에 따라 달리 정답이 있고 자기가 믿는 것이 더 와닿는 경우의 다른 예가 도 잇다. 컵에 담긴 절반의 물을 놓고 아직도 반이나 남은 사람과 반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나뉘는 경우가 그렇다. 그냥 보는 사람의 기준이지 무슨 법이 있을까?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끝없는 상황들의 반복일 뿐이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보는 사람과 아무리 애를 쓰도 뒤에는 꼭 불행이 오더라고 보는 생각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일생을 갈라놓는다. 멀리 살아보고 끝에 가야 아는 것이 아니다. 당장 하루 종일을 보내는 표정과 말투와 심정도 달라진다. 당연히 행복의 정도도 하늘과 땅 차이로. 원숭이는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선택함으로 행복해졌지만 인간은 아침에3개 저녁에 4개가 더 행복해지는 선택이 된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박완서는 남편과 아들을 폐암과 교통사고로 연달아 떠나보낸다. 특히 아들의 돌연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 박완서는 가족들의 권유로 부산에 있는 딸에게로 갔다가 인근에 있는 분도수녀원에 머물게 된다. 이때 쓴 책이 '한 말씀만 하소서'다. 박완서는 이 수녀원에서 조 테레사라는 젊은 수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책이 전하는 그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수녀에게는 골치덩어리 남동생이 있었다. 집안에 편안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 모양인가, 원망도 수없이 했다. 그러다 문득 수녀는 '세상에는 속 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 되리라는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었다고 한다. 조 테레사 수녀의 한 마디는 자신의 상처 속에만 웅크리고 있던 박완서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아들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왜 내 아들이면 안 되는가, 라는 사고의 이동! 돌아누움, 뒤집어 생각하기! 구원의 싹이었다.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되는가. 왜 나라고 해서 특별해야만 하는가. 나의 가족, 나의 아들딸, 나의 형제만 지복을 누려야할 특별한 존재인가. 아픔은 사람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왜 나인가?"에서 "왜 나만 특별해야 하는가?"로의 자리이동!!!! 그래, 고통이여, 나는 수많은 아픈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던 조 테레사 수녀, 그리고 박완서. 그래서 이 분들은 생각 바꿈 하나로 절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기운을 회복했다. 외부적으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도 아니었지만 단지 바라보는 생각의 다름, 기준하나 바뀌면서 다시 살 힘을 얻었다. 바로 이 힘이 사람이 꼭 필요한 조삼모사, 어려운 일이 몰려와도 반드시 그 뒤를 이어 우리를 돕고 힘을 나게 하는 좋은 일들이 온다는 시각을 가져야할 이유다. ‘왜 늘 뒤에는 나쁜 일들만 오는가?’ 에서 ‘근심 중에도 기쁜 일을 주시는 분이 계신다!’ 는 믿음의 시각으로, 꼭 같은 삶의 행로를 살면서도 누구는 죽어버리고 누구는 감사로 살아가는 차이는 단지 그 차이에서 온다. 원숭이는 아침만 보고 사람은 하루 전체를 보는 차이? 나는 하루가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해지는 나의 십계명’을 들먹이며 이용하지만 일생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람의 ‘조삼모사’, 즉 지금 당하는 고난의 의미와 나중 받을 위로를 약속하는 신앙을 붙들고 산다. 인생은 풀이나 꽃이고 말씀은 영원한 약속이라고.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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