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보석 만들기 - 예수와 가룟유다>
‘내 속엔 선한 것만 가득하고 당신 속엔 악한 것만 있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기분 나빠지면서 울컥 비난 가득한 반론을 쏟아낼 것이다.
그럼 이 말은 어떨까?
‘내 속엔 악한 것만 가득하고 당신 속엔 선한 것만 있다!’
얼굴 한구석이 조금 간지럽고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별 영양가가 없는 말이라고 무시할 것이다. 가벼운 부정?
사실은 기분의 문제를 걷어내고 보면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틀린 말이기도 하다.
내용은 대립적인데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을까?
사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특히 의로움과 죄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이렇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에게 돌 맞을 소리.
“니나 나나! 사람은 다 똑같다 거기서 거기...”
이건 양비론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는 말을 수용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저 착한 신자의 입장처럼 모두 받아들이지만 몸 밖에서 한 치만 심장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안 받아들이는 구절이 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
살아서 하늘로 불려간 에녹이나 당대의 의인 노아 등 있다고 내놓을 이름이 떠오르겠지만 예수님의 말에 따르면 이 시대에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완전한 의인이 있다고 못한다.
심정적으로야 ‘나는 조금 남보다 의롭지 않은가?’ 하고 싶겠지만...
특히나 사람들에게 존경(유명한 것이 존경의 척도가 맞나? 존경이 곧 의로운 사람을 보장하는 것도 의문이지만)받는다고 나름 자신을 으쓱해하는 종교인들이 더 그럴 것이다.
성경대로! 느낌으로 정직하게 본다면 우리는 의인 아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맞지 중간이나 제3의 구분이 어디 있나?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색상에서 흑색과 백색은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정밀하게 말한다면 완전한 흑색도 완전한 백색도 없다.
99.99%의 흑색과 백색은 가능하겠지만.
백색에서 흑색까지의 색의 스펙트럼을 아주 많이 늘어놓으면 99.99%의 백색 바로 곁에는 99.98%의 백색, 그 바로 옆에는 99.97%의 백색. (사실은 더 작은 수치의 예를 말하고 싶지만 너무 지루하니까 크게 건너뛴다.) 이렇게 백색에서 흑색까지 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럼 어디를 무 자르듯 토막 내고 이쪽과 저쪽을 백의 범위와 흑의 범위로 나눌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중간을 뭉텅 건너 비교해서 검은 것과 흰 것으로 반대쪽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흰색 속에는 검정색이 있고 검정색 속에는 아주 작은 백색의 씨앗이 이미 있다.
색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성품과 죄의 문제도 그렇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은 이태리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진 벽화이다. '최후의 만찬'은 1491년~1498년까지 무려 7년에 걸쳐 완성된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그림을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 속 '예수'가 되어줄 모델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다빈치는 어떤 선하고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을 찾았다. 149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 사람을 모델 삼아 예수의 그림을 완성하였다.
다음에는 은 서른 냥에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의 모델이 될 사람을 물색했다. 마땅한 사람이 나서지 않아 끝내는 형무소를 찾아갔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죄수를 찾아냈다. 적임자라고 생각한 다빈치는 형무소에 가서 허락을 받은 뒤 그림을 시작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모델을 해 왔던 사람이 돌연‘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다빈치가“글쎄요?”라고 대답하자 그는‘제가 일전에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예수의 모델을 했던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6년 전 그렇게도 깨끗하고 선해보였던 젊은이가 로마 최악의 살인마가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다빈치는 이후로 예수에 관한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의 루브루 박물관에는 다빈치의 편지가 있다. 다빈치는 편지 속에서 그 사람이 자신 속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파리의 부랑자 소굴에서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빈치는 심지어 우리가 보통"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 사람 속에는 예수도 있고 가룟 유다도 있다는 것을 말한 사람이 또 있다.
- ‘인간의 마음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늘 싸우고 있다’
러시아 출신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말이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그의 여러 작품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갈등이 표현된 것이 많다.
멀리 갈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자주 내 속에서 천사와 악마, 그 두 얼굴, 두 성품을 만난다.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 내 생각과 달라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
정치적 종교적 소신이 다른 사람들.
그래서 생기는 미움과 적개심들에 너무 힘들어하고 때론 분노의 복수를 실행하기도 한다.
말로만 그칠 때도 있고 다양한 구체적 행동으로 실행하기도 한다.
그 결과 나는 두 가지 전혀 다른 평판을 얻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얻은 ‘착한 사람’과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게서 얻은 ‘나쁜 사람’ 내 속에도 천사와 악마가, 사랑과 미움이, 의로움과 죄악이 존재한다.
색상에서만 경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품과 영혼에도 경계가 없음을 깨닫는다.
사람 속에는 미움과 자비가 강을 사이에 두고 극과 극으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이웃으로 있다는 것을.
선한 사람의 마음에서 바늘 끝 같은 미움으로 한발씩 옆으로 가면 거기 악한 사람이 있고, 반대로 악한 사람도 실오라기 같은 사랑으로 한발씩 옮기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고 속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속이면서 세상에서 영화도 누리지만 과연 하나님도 모르실까? 성경속에서도 시장사거리나 회당의 앞자리 높은 곳에서 두 손 들고 자신의 자랑스러운 종교생활을 자찬하는 사람보다 구석에서 골방에서 가슴 치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구원을 베풀고 자비를 주셨다.
“아무도 자랑하지 말고 큰소리치지 말라!”
“사람 속에는 영원한 의로움도 없고 의인은 단 한명도 없다!“
우리에게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하신 이는 우리가 스스로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엄격한 기준을 주셨다. 사실 우리 속을 들여다보면 늘 위험한 두 가지 성품이 날마다 싸우며 때론 천사가 때론 악마가 되면서 살아가는 죄인들이 분명하다. 거기서 거기인 존재...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구석에서 가슴 치는 죄인을 천금보다 귀하다고 인정하시고 품에 안아주셨다. 다른 누구도 정죄하지 못하도록 용서도 하셨다.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은 하나님만이다. 완전한 의로움을 가진 이가 아니면 누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겠는가.
이것은 결코 악을 변호하자는 것도 죄를 덮고 눈감아주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고 포장하려고 애를 쓰도 우리 속의 더러움을 아시고,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보잘 것 없고 욕해도 우리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는 분이 계신다.
그러니 다만 선하다고 자만하지말자는 것이고, 죄인이라고 포기하지말자는 것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보석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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