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그저 견딜 수밖에...'없는 신앙>
“야! 이 씨X년아, 왜 여기 샤워실을 사용하냐구! 눈X이 삐었냐?”
참 옮겨 표현하기도 민망한 육두문자를 복도가 떠나가도록 소리지른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의 불편을 서로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재활병원에서
유독 성질이 사납고 욕을 잘하는 사람이 한명 입원하면서 점점 심해진다.
“왜 거기 기다리슈? 여자는 여자화장실로 가야지 말이야!”
아내와 씻고 오늘도 변함없는 배변 씨름을 하려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그 쌈닭같은 남자 환자가 시비를 걸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자기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어디를 가면서 그런다.
그러고도 궁시렁 투덜거리며 별로 아름답지 않은 단어가 섞여 내 귀에 들렸다.
피가 확 거꾸로 도는 기분이 들었다.
억울한 소리를 못 참는 내게 거의 시비에 가까운 그 던지는 말들은 참 괴롭다.
그런데 나는 못 싸운다. 지난 번 두 번이나 저런 사람과 싸우다가 아내에게 약속했다.
“제발 환자하고는 싸우지 말아줘...”
“알았어, 약속할게.”
대부분 몸이 불편해 중심도 못 잡고 뛰지도 못하는 사람들인데 싸움도 안 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주먹질이 안 되니 칼이나 둔기로 화를 폭발하기 십상이니.
잠잠히 입 다물고 참았다. 길 걷다가 느닷없이 누군가 와서 뺨을 때리고 가듯,
고스란히 얻어맞고도 무슨 죄인처럼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사람처럼.
그런데 열불이 식지 않는다.
“아, 정말 살기 싫다. 이런 인간들이 우글거리고 이러고 사는 지긋지긋한 생활이...”
평생을 뾰족한 대책 없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 없이 살아야 한다는 예상이 숨을 콱 막히게 한다.
힘든 일을 하거나 장거리를 걷고 난 날 잘 때 다리 근육통으로 비명지르듯
사람의 심장에도 근육이 있나보다. 가슴이 근육통처럼 당기고 아파 온다.
참다못해 씩씩거리며 내 입에서 저주가 나왔다.
저 인간이 쿵 자빠지거나 아님 지진이나 화재로 빌딩채로 폭싹 무너지라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는 내게 아내가 울상으로 말했다.
“당신 그럴 때마다 듣는 내 심정은 어떨지 생각해봤어? 많이 힘들어...”
내 괴로운 환경의 원인제공자가 되어버린 아내의 비참한 심정이 확 다가온다.
‘어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내 때문에 하소연도 못할 이 형편을’
이런 순간에 마주치면 수십 년 쌓고 들먹이던 고상한 신앙훈련이 헛일이다.
입에 달고 침 튀기던 하나님사랑 운운도 참 맥을 못 춘다.
목숨이 오가는 거창한 순교의 상황도 아니고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일도 아닌데.
이런 한심하고 비참한 심정이 싫어지고 내 꼴이 미워 또 화가 난다.
내가 바라는 꿈도 비는 기도도 단순해진다.
황금길 천국을 가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감탄하는 큰일도 아니다.
그저 아침이면 일터로 가서 땀 흘리고 저녁이면 가족이 모여 하루 이야기를 나누고
밤이면 곤히 단잠을 자게만 해주시라는 것.
그 소원에 무슨 빼어난 신학이나 목숨 바치는 신앙이 필요할까.
사실 이 괴로움의 처지와 순간에 그런 허울들이 허당으로 아무 힘도 안 되는 걸 경험하기도 한다. 잘난 듯 보이든 것들이 정작 인간의 고통이 심한 자리에서는 말장난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거창하지 않고 고통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단순한 신앙고백이 생명을 주기도 하더라.
얼마 전 5월 10일,
뉴저지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의 딸 허예내(23) 씨가 새벽 3시경 10대 청소년이 휘두른 칼에 찔려 병원에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
(아래는 뉴스미션에 실린 기사의 내용이다.)
[ - 강도에 딸 잃은 목사 “때론 그저 견딜 수밖에…”
허 씨의 아버지인 허봉기 목사는 허 씨가 숨진 날인 10일 주일, 묵묵히 설교를 전하고 예배를 마쳤다.
이날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란 제목의 설교를 통해 허 목사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다. 경험되는 것이다. 행복은 환경에 있지 않고 우리의 태도에 있다”고 말했다.
담담해 보였던 그였지만, 발인예배가 있던 14일 저녁 허 목사는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짤막한 칼럼을 통해 딸을 잃은 아버지로서 심경을 전해 교인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는 칼럼에서 시각장애인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씨의 말을 빌려 “그의 말처럼, 살다 보면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야 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용기를 가진 적도 잃은 적도 없다. 인생은 용기로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다. 신앙이 나를 지탱해 주겠지만 내가 신앙을 지탱해야 할 때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그럴 듯한 수사가 아니다. 정말 가슴 한 켠에 묵직한 것이 들어 앉아 있다. 하루 종일 예내 생각, 혼자 있으나 함께 있으나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며 “일 당하고 하루 이거 쉽지 않겠구나, 퍽 오래 가겠구나 싶었던 데 비하면 이제는 그런 마음이 많이 가셨다”고 전했다.
이어 “어차피 한 두 해에 청산될 일은 아닌 것 같다. 마음이 힘든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툭 털어버리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다. 신학자 한스 큉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해 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고난을 헤쳐 나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그만하면 다행이지 않은가. 나는 이제 아들을 잃으신 적이 있는, 같은 처지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교인들의 많은 위로와 도움으로 장례를 잘 마쳤다는 그는 교인들을 향한 감사의 메시지도 썼다.
그는 “딸 아이의 느닷없는 퇴장으로, 저희 가정이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안타까워하며 따뜻한 마음 보여주셔서 감사 드린다”고 전했다. - 뉴스미션]
그렇더라. ‘때론 그냥 견딜 수밖에’ 없는 날들을 지나가며 살아야 하더라.
병원에서도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들이받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 되고 그러다가 퇴원조치를 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다고 그런 일이 사라지지도 않고 사람이 얼른 변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 속에 눌린 삶의 고단함과 유리파편처럼 깨어지고 병든 앙금들이 있는 한...
우리 모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들 세상살이 중에 아들이나 딸에 버금가는 슬프고 억울한 그 무엇들을 한두 가지씩 잃고 산다. 하나님도 팔이 짧아서 닿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홀로 외로운 자리에서.
다행인 것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 자리에 서신 적이 있고 그 아픔을 아시는 분들이라는 것,
그래서 공감하시며 이 땅의 삶의 길을 곁에서 동행해주신다는 것.
오늘도 ‘때론 그저 견딜 수밖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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