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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대속의 죽음 - 작은 무한대보다 더 많은 무한대?

희망으로 2015. 3. 6. 22:21

<무한대 속의 죽음 작은 무한대보다 더 많은 무한대?>

 

국어사전에는 무한대를 이렇게 설명해놓았다.

- 명사(1) 한없이 크거나 많음. 형용사 (무엇이)한없이 크거나 많다.

 

그렇다. 무한대는 그냥 무한대 한 가지다.

언어의 개념상 작은 무한대나 더 많은 무한대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이다.

작으면 이미 무한대가 아니고 더 많은 무한대라는 말도 단지 중복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설명으로 그 개념이 이해되는 영화가 있다.

안녕 헤이즐이라는 영화에서는 그 무한대의 설명으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일찍 헤어지는 연인이 아픔을 달래고 있다.

사랑에는 아무리 작아도 무한대가 있고,

그 무한대를 공유하면 이별도 받아들이고 참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연인을 앞에 놓고 하는 추도사로...

 

(이 이야기를 통해 때론 억울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담고 사는 사람들이

조금은 위로가 되면 좋겠다.)

 

(null)

 

넌 천국이 있다고 믿니?”

아니...”

나는 믿어, 안 그러면 죽음이 아무 의미가 없잖아?”

 

17살의 헤이즐은 갑상선 말기암에서 죽음 직전에 기적으로 살아났다.

거의 가망성이 없어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신약 실험 대상자가 되었다.

부작용으로 더 이상 못 견딘다고 엄마조차 마지막 인사를 나눈 그 밤을 고비로.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으로 전이가 되었고 폐암은 치명적으로 악화되었다.

 

17,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얼마나 많은 기쁨과 행복한 순간이 기다릴까.

우리들이 보통 평균수명, 또는 자연수명이라고 부르는 나이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그렇게 이별을 할 경우 많이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는 것이 그런 이유다.

 

18살의 어거스터스를 만난 그녀는 더욱 짧은 시간이 남은 것을 힘들어하며 몸부림 쳤다.

어거스터스는 골육종으로 다리를 자르고 큰 수술과 치료로 암을 극복했다.

그런 어거스터스를 부러워하며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지만 굳이 감춘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겠다고 친구로만 지내자고 한다.

그렇게 헤이즐은 착했다. 아니, 사는 날이 짧은 사람들은 곧잘 그런 마음을 가진다.

 

그러나 누가 알까? 사람의 떠나는 순서를.

오히려 급속도로 재발이 되어 손 쓸틈도 없이 퍼져버린 어거스터스가 먼저세상을 떠난다.

겨우 사랑을 서로 고백하고 아주 짧은 날들이지만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겨우 했는데...

힘들어하는 헤이즐에게 어거스터스가 오히려 위로하며 한 질문이 그거였다.

 

천국을 믿어? 우리 다시 만나자!”

 

어거스터스가 믿는 이유는 이거였다.

- ‘만약 천국이 없다면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렇다. 천국이 없다면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끝일 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끝.

더 큰 문제는 죽음이 의미가 없다면 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알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맥 빠지는 삶이다.

아무렇게 무슨 짓을 하며 살아간들 아무 의미가 없는 종점에 다다를 뿐이니.

 

겨우 헤이즐의 공허함을 달랜 어거스터스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헤이즐과 막연한 친구 아이작을 불러서 장례식을 미리 거행한다. 살아서 미리 듣는 추도사를 부탁하면서.

헤이즐은 둘의 사랑에 대해 말을 꺼냈다가 울음을 감당 못해 사랑이야기는 그만한다.

그리고 이어서 한 추도사가 수학으로 설명하는 작은 무한대보다 더 많은 무한대이야기다.

 

숫자 ‘0’‘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가 있습니다.

0.1 이 있고, 0.12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외에도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지요.

물론 ‘0‘’2‘ 사이, ’0‘과 백만 사이에는 더 큰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지요

 

그리고 헤이즐은 자기의 고백을 했다.

 

전 제게 주어진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를 원하고, 더 큰 숫자가 있기를 바랬지요.

하지만 난 우리에게 주어졌던 작은 무한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넌 나에게 한정된 나날들 속에서 영원을 주었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어려서 고아가 된 사람들이나 일찍 부모를 떠나보낸 아픔을 위로하는 이런 말이 있다.

- ‘모든 사람은 나이 들어서 다 고아가 된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진실이다.

그렇게 고아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우리는 모두 세상을 떠난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서 겪는 그 과정의 고아는 그렇게 오래 많이 슬퍼하지는 않는다.

장수하여 제 수명을 다 살고 가신 분들은 호상이라고도 하고 축하를 해주기도 한다.

 

그럼 80세에서 한 살 적은 79세는? 78세는? 77세는...

그렇게 딱 어느 숫자에서 여기부터는 아니고! 라는 담벼락으로 가를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런 개념과 같은 설명이다. 그렇게 보면 남들보다 많이 이른 나이,

18세와 17세의 연인의 이별과 상실도 숫자만으로 불행과 행복으로 가르지 못 한다고 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공감,

아무리 짧아도 영원으로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느냐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무한대를 가질 수 있게 한다.

헤이즐은 가기 싫은 암환자 모임을 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암으로 죽어가는 것보다 더 불행한건 암으로 죽어가는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일거야

(본인은 죽음으로 고통이 끝날 수도 있지만 부모에게는 계속된다고 보았다.)

 

그렇게 남겨져서 고통을 겪을 엄마를 걱정하던 헤이즐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폭발을 했다.

 

엄마는 내가 죽으면 얼마 못가서 밥도 못 먹고 울다가 죽을 거야!

그러니 내가 걱정이 되어 죽을 수도 없잖아!“ 하며 통곡을 했다.

깜짝 놀란 아빠와 엄마는 뜻밖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사실 난 사회복지사 석사과정을 배우고 있어,

너가 떠나고 나면 이 경험으로 암환자 가족들을 상담하고 돕는 일을 할거야

뭐라고? 정말이야? 그런데 왜 말을 안했어?”

니가 서운해할까봐, 너는 아무 것도 못하는데 우리만 열심히 산다고 서운해 할까봐...”

무슨 소리야! 정말 고마워! 이제 마음 놓아도 되겠어!”

 

그렇게 떠나는 사람은 남겨지는 가족을 또 염려하는 것이 사랑의 무한대다.

남자친구 어거스터스의 집에 들어서면 벽에 걸린 문구가 있었다.

 

-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견뎌라.’

 

어쩌면 사랑으로 주어지는 짧은 순간에 무한대를 공감하고,

상실되는 생명을 절망으로 몸부림치지 않는 것은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를 견디는 심정과 같지 않을까?

 

더 많고 더 큰 무한대를 가지지 못해도 원망하지 않고 죽음의 의미를 담는 것은

무지개를 기다리고 기뻐하며 보는 마음을 가질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무지개가 천국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