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서 사랑하다가, 돌려주고 가는 세상....
어느 누군들 작정하고 원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사람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듣지도 만나지도 못했고, 자기 한 목숨도 그럴 진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할까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나 자매, 친구나 선생님, 사랑하는 연인도...
애지중지, 늦둥이로 얻은 자녀에 대한 사랑은 더 유난해집니다. 머리로는 아는데도 먼저 난 아들들보다 자꾸만 애스러움과 끊이지 않는 관심은 잘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어릴 때 큰 아이는 너무(?)사랑받는 딸아이가 약 오르고 화가 나서 아이의 사진인가를 박박 찢어서 없앴다는 고백을 엄마를 통해 들었습니다. 다행하게 심한 상처로 남지도 않았고 오래 가지도 않아준 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왜 안 그럴까, 미안하네... 그러며 들었습니다.
그러니 나이 백 살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음성을 들은 늙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떠올려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한 듯, 그가 믿음의 조상이고 무조건 따르는 본보기 멘토니 아들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러 당당히 갔다고 말합니다. 주저하거나 원망스런 마음 한구석도 없었고, 티끌만치도 아깝지 않았다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그리곤 다음 단계로 당연히 돌려 받고 모래알 같은 후손과 넘치는 복을 받았다고, 믿음의 시나리오는 그렇게 상투적일 정도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거래를 종료시켰습니다.
그가 밤새 고민을 했는지, 정말 고민스럽고 아까워서 모리아산을 빙빙 돌면서 시간을 끌어가며 올랐는지, 마지막까지도 아픈 마음으로 올라간 팔이 부르르 떨렸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갖 가정과, 때론 보고 싶은 데로, 믿고 싶은 데로 해석하고 전하고 받아들입니다. 무엇이 정답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다만 제 감성과 경험, 바람으로 이렇게 생각해볼 뿐입니다.
집착과 헌신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누가 뭐래도 변명할 수도 있고 끌어다 아전인수식으로 설명도 가능합니다. 그 본심은 모르면서도 말입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심지어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누군가를 키우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권력의 시종, 시녀들이 그랬고, 목숨을 잃도록 자식을 1등으로 만들던 얼마전 세상을 가슴아프게 한 어미의 뉴스도 그랬습니다. 진정으로 그 누군가가 잘되는 길인지, 복이 되는 방법인지를 따져본다면 그릇된 모습들 말입니다. 그것이 집착이라고 불리지만 어떤 경우는 정말 누군가의 성공이나 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승객을 살리고 배와 좌초하는 선장도 있고, 일생을 낮은 사람으로 머물며 지도자를 섬기는 헌신적인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그 현상은 집착과 헌신이 별 구분 안 될 정도로 지극하지만 본심이 다를 경우는 천지 차이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입니다.
친절과 간섭도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모든 활동을 일일이 간섭하고, 조금만 벗어나도 실망하고 비난하는 하는 것은 간섭입니다. 늘 전 후 좌 우를 살피고 고려하면서 눈에 안 띄게,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슬쩍 채워주면서 마음 부담을 안주는 것은 친절입니다.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그 모든 핻동의 목적, 의도가 어느 쪽에 위치 해있는가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우길 수도 있어서 남들을 현혹시킬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은 나중에는 거짓말이 되기도 하고 위선이 되거나 사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 진심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아주 나중에야 모두가 알고 바로 평가를 받겠지만 그 당시에는 오직 본인밖에 모를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경우로 무관심과 배려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놓아주는 것,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방임주의’라고도 하고, 자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돌보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장애가 된다고 무심하기를 가르치는 장애우 돕기나 재활보조의 원칙을 말하기도 합니다. 무조건 필요한 것을 다 주거나 언제나 들어주는 것이 해가 된다고 한발짝 떨어져 같이 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동반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마음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중심이 상대에게 있으면 그것은 배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적 현상, 외형만 흉내내는 것 중에는 정말 무관심도 있고, 말만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돕지 않고 냅두면서 자립을 해야 한다거나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본인만 알지도 모릅니다.
남과의 관계 속에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중심에 따라 달라지는 집착과 헌신, 친절과 간섭, 무관심과 배려의 진실게임을 해가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어떤 경우인가에 따라 우리는 ‘평화’ ‘은덕’ ‘행운’ ‘감사’라는 단어들을 쓸수도 있고, 반대로 ‘배신’ ‘상처’ ‘아픔’ ‘불행’ 등의 단어들을 되새기며 일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두가지 섞여서 뒤죽박죽, 불행중 다행, 뭐 그러면서 살기는 합니다. 똑같은 논리로 나는 누군가에게 그 역할로 살다갑니다. 단지 내게는 ‘사랑’ ‘보람’ ‘평안’ ‘기쁨’ ‘자존감’ 이런 느낌을 가지기도 하고, 남은 속여도 자기는 속이지 못해서 ‘미움’ ‘갈등’ ‘비난’ ‘질시’ ‘불안’ ‘어둠’ 이런 느낌들을 안고 감추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야 뭐라고 하던, 뭐라고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헌신, 친절, 배려, 이런 나눔을 주고 받는 상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 행운 사랑 평안 이런 느낌을 늘 불러오는 소중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것이 대개 배우자나 부모, 자식이기도 하고, 스승이나 친구, 성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상대, 관계가 깨어지고 상실될 때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그것은 상대를 잃는 순간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한 몸 어딘가가 떨어져 나가는 상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순종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 이미 일어나버린 상처를 추스르고 계속 살아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정말 포탄으로 집이나 다리의 절반쯤이 날아가버린 상태일 경우에 말입니다.
제게도 그것은 늘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고 평안을 깨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그 상대나, 관계가 소중할수록 가까울수록 그 정도는 더 커집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 되기도 하고 올가미가 되기도 하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은 안돼! 라고 하는 것을 협박의 대상으로 삼거나 인질로 하는 경우를 영화나 책, 역사에서 종종 보기도 합니다. 아무 관심이 없는 물건이나 사람, 일이라면 누가 가져가거나 잃거나 무슨 동요가 있겠습니까, 제게는 늦게 얻은 막내 딸아이가 그런 소중한 대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닮기도 했고, 어쩌면 아내보다 더 순수하고 넘치는 재능, 안겨오는 신뢰가 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그 불안으로부터 저도 벗어나고 아이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 서약을 스스로 했습니다. 아무 근거도 효력여부도 모르는 말도 안되는 종신서약을, 그 내용은 아이가 세 살까지는 온전히 품안의 새끼처럼 살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고, 세 살이후는 생명을 포함한 모든 환경과 진로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그러니 부디 세 살까지는 아무 일 없기를, 상실당하는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부탁이자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무살까지는 위탁받은 부모로 살다가 그 이후는 그조차 아이와 하나님이 직접 의논하고 해결해가는 완전 독립으로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부터는 잠도 설치는 불안으로부터 많이 놓여졌습니다. 어차피 세 살은 지났습니다. 나보다 더 길게, 깊이 계획을 세우시는 하나님이 이끌어가실테니 제 집착과 간섭은 그만두어도 되었습니다. 조금은 무관심과 비슷한 방임주의로 대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그것을 방목이라고 하면서 고맙다고 한 적이 있으니 크게 나쁜 결과는 안가져온 것 같습니다.
따지고보면 그 관계와 적용이 왜 막내 딸아이만이겠습니까. 다만 실감나게 나를 몰아붙이고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감정의 대상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제 그 경험을 조금씩 넓혀 적용을 합니다. 생명의 취사를 어쩔 수 없는 순간을 통하며 얻기는 했지만 아내도 그렇게 했습니다. 두 아들들에게도 약하지만 그런 입장에서 제 속에 담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가족들이지만 모두 빌려서 사용하는 동반자일 뿐 언젠가는 돌려드려야 할 하늘의 재산이니까요. 그것은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내에게, 제가 아이들에게, 그런 대상이겠지요. 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 힘을 주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길을 가는 동해으로 말입니다. 언젠가 이 길이 끝나고(물론 따로 시기가 다르겠지만) 모두 하늘 어디선가 만나겠지요. 그때는 시한부 만남도 아니고 불안정한 관계도 아닌 상황으로 영원히 하겠지만,
빌려서 함께 살다가 가는 사람들, 저 또한 포함하여, 먼저 보내고 나중 가는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빌려서 사용하는 동안 잘못 사용하면서 보내지는 말아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울고 불고 해도 소용없을 헤어짐의 아픔보다 그것은 더 아파해야할 문제로 봅니다. 늘 집착과 간섭, 무관심으로 함께 지내다가 어느 날 헤어진다고 울고 불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마음입니다. 살아서 잘 지냈다면 감사히 돌려주고 언젠가는 나도 돌려져서 다시 만날 것이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일시적인 충격이나 기억들로 자주 그리움에 빠지겠지만, 원천적인 희망을 가지는 한 참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모양으로 가족, 친구를 보내고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 또 공감하면서, 저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갈 때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저 또한 그럴 날이 온다면 어떻게 견디고 받아들인건지를 고심하며 묵상했습니다. 결론은 그랬습니다.
“빌려서 사랑하다가, 돌려주고 가는 세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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