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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마른 날에 우산을 준비하는 아이를 닮는 것!

희망으로 2012. 3. 11. 11:32

믿는다는 것,

 

오랜 가뭄에 비를 오게 해달라는 기도회를 하러 교회를 가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아이가 비옷과 우산, 장화를 기어이 꺼내어 신고 집을 나서는 것입니다. 말리던 부모도 시간이 늦어 그대로 교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어떤 사람도 아이와 같은 차림으로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왜 그렇게 입고 왔냐는 물음에 아이는 기도회를 드리고 갈때는 비가 올지 모르니까 미리 준비를 하고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의 대답을 듣고 많은 사람들, 특히 어른들은 속으로 웃었으지도 모릅니다. 신앙의 연륜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상식이나 현실을 너무 익숙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어느 마을에서 술집이 새로 들어오자 많은 문제가 생기고, 속을 태우게 했습니다. 그 마을의 교회 담임 목사님은 교인들 앞에서 그 술집이 불이라도 나서 문을 닫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불이 나서 망했고, 그 술집 주인은 나중에 마을 교회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며 재판을 걸었습니다. 판사가 그런 일을 인정하느냐고 목사와 교인들에게 물었고, 모두 그런 일은 있지만 그렇다고 실재로 그런 일이 일어난 책임을 지고 피해를 보상하라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판사는 술집 주인에게 다시 묻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냐고, 술집 주인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데 안 들어줄 수가 있었겠냐고, 틀림없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정작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누구를 더 기뻐했을까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는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고 대부분 웃어 넘깁니다. 설교에나 인용하는 예화 정도로 가볍게 들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정말 그렇게 믿고 행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욥바에 사는 도르가(다비다)가 병이 들어 죽었을 때, 이웃 여자들은 도르가를 씻기고 다락방에 누였습니다. 대부분 시신은 1층 입구에서 가까운 방에 두고 상을 치르는데 굳이 다락방에 누였습니다. 또 하나는 시신에 바르는 기름을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두가지 이유였습니다. 구약의 엘리야도 다락방에서 죽은 사람을 살렸고, 그 제자 엘리사도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를 살렸음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처에 와 있는 베드로를 부르러 가면서 도르가를 다락방에 누인 것입니다. 당연히 살아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시신에 바르는 기름도 바르지 않고...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도르가가 베드로의 기도후에 살아나자 사람들을 부르는데 성도들과 과부를...’이라고 따로 구분해서 말했습니다. 믿고 다음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세상의 상식대로 죽었다고 울기만 하는 두 부류를 분명히 구분해서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믿음은 곧이 곧대로 믿을 때 힘이 있습니다. 도르가를 다락에 누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1층 방보다 힘든 다락으로 누이고, ‘급히사람을 두 명이나 베드로에게 보냈습니다. 시신에 기름도 바르지 않고... 그 후 살아난 도르가로 인하여 욥바에 믿는 사람이 많이 늘었더라! 라고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하늘나라이고,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믿는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비옷을 준비한 아이를 비웃는 모순된 사람들과 같습니다. 어쩌면 교회를 나오지 않는 술집주인보다 낮은 점수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믿으면 부르는대로, 보내는 대로 가야만 하겠지요. 통일이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통일이 되었을 때 필요한 비용을 교회도 적립해가야 할 겁니다. 누군가 부모가 필요한 아이를 돌보겠다고 기도하면 아이를 위한 방을 하나 준비하고 꾸미고 청소도 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이라야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믿으면 믿는 그대로 살게 되기를 참 많이 구합니다. 너무 물과 기름처럼 따로 흘러온 신앙의 세월이 눈에 선하게 보여 부끄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