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플레레스’는 보통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심히 많다’로 번역했습니다. 이재철목사님은 ‘사도행전속으로 4권’에서 이것을 아주 탁월한 번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 사도행전 9장 36절’ 부분입니다.
한 여인이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 여인이 누인 다락방으로 간 베드로에게 또 다른 이웃 여인들이 우루루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속옷과 겉옷을 내보였습니다. 당시 속옷과 겉옷은 단순한 의복차원을 넘어선 전당포에 맡기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재산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입단가 준 옷도 아니고(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고 올 수가 없을테니까요) 새 옷으로 직접 지어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죽은 여인, 도르가(다비다)에게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했을 겁니다.
적당한 정도를 넘어서는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 혹은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낭비’입니다. 도르가에게 붙여진 ‘심히 많더니’는 분명 ‘낭비’에 속하는 만만치 않은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왜 도르가는 그런 ‘낭비’에 가까운 선행과 구제를 했을까요? 그래서 임종 후 이웃 여인들의 눈물과 칭송을 듣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죽기 살기로 따르던 한 분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낭비’는 바로 자기의 몸과 생명을 다 ‘낭비’하신 예수를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더라도 좋은 방이나 최소한 감옥에서 빠르고 고통 없이 한방에 죽어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손발에는 대못으로, 허리에는 창으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주는 대속의 의미로 돌아가셨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철저한 자기 낭비였습니다.
그렇게 받은 사랑으로 눈을 뜬 도르가 역시 주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지나칠 정도로 낭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본질이 ‘플레레스’, 계속 흘러넘치는 낭비였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자기 낭비가 자식을 성장케 하고, 도르가(다비다)의 자기 낭비가 수많은 과부들의 생명을 따뜻하게 품어주었고, 주님의 자기 낭비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신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낭비이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낭비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의 낭비가 더 이상 쓸모없는 낭비가 아님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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