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길/신앙 공동체 자료

두세계 사이에 사는 라르슈 공동체!

희망으로 2010. 6. 27. 13:13

라르슈 공동체 소개는 라르슈의 장바니에님의 책 '두세계 사이의

 

하느님 나라'에서 간추려 인용했습니다.

 

내용과 시작 동기도 잘 나와 있습니다. 좀 부족한 자료는 장바니

 

에님의 나머지 책들에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희망의

 

문'이나 '공동체성장'이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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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 사이의 하느님 나라

내가 하느님 섭리의 신비스러운 계획에 따라 성인 정신 박약자들의 세계를 접하기 시작한 때는 1964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 일은 내게 있어서 하나의 특별한 발견이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철학을 가르치려는 참이었습니다. 콩피에뉴 산림 지대 가까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 트로슬리브로이로 친구인 토마스 필립보 신부를 만나러 갔는데, 그는 얼마전부터 성인 장애자 센터에서 지도 신부로 일하는 도밍고회 수사 신부였습니다.

거기서 나는 장애자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그들과 함께 벽을 칠하고 부서진 데를 고치고 보수하자고 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대단히 즐거웠습니다. 그들은 나를 받아들었습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는 교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애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학생들과의 만남에서는 체험할 수 없었던 만남의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나는 그들에게서 특별히 풍부한 감성의 세계를 발견하면서 사회가 그들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정신 병원,요양소,저능인들을 위한 기관들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사람들이 멸시 속에서 무너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목격했습니다. 한 방에 사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엄청나게 부족한 일손...  나는 대체로 거의 교도소 생활을 하다시피 하는 그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따뜻한 사랑의 분위기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해 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1950년에 해군 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나는 그 생활을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그것은 진정 나의 생활이었고 내 삶의 목표였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나의 내면에서 기도하고 신학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일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러한 내적 변화가 마시고 외출하고 하는 그 군대 생활과 충돌을 일으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나는 사직서를 내고 파리 근교에 있는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서, 거기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하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지냈습니다.
나는 힘없고 나약한 그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잘 알지 못했던, 아니 알았다 해도 오직 이론적으로만 알았던 복음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명을 나의 내면으로부터 느꼈습니다.
내가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의 내적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했고, 또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보이는 멸시 때문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약간의 가구가 갖추어진 허름한 작은 집 한 채를 얻어서, 콩피에뉴 근처의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던 라파엘과 필립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1964년 8월 4일 라르슈(L'Arche)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될 수 있는 라르슈(방주), 그리고 버림받은 이들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다리가 될 수 있는 라르슈, 곧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애련함의 모친이신 동정녀 마리아를 상징하는 언약의 라르슈 디 란자 델 바스토(L'Arche di Lanza del vasto)와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도 아마 바꾸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처음에 내가 정신 장애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동정심 때문이기도 했고, 또 예수께서 불쌍한 이들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시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점차로 내 사랑의 생활, 불쌍한 이들을 만나는 내 애덕의 생활을 발전시켜 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라파엘과 필립보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있었던 모든 인간적 영적 발전 능력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선택과 요청을 충분히 존중하기는 커녕, 그들이 내게 복종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또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인격을 발견할 줄 알게 되었고, 또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베푸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베푸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르슈의 목표는 나의 생각과 계획에 의해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하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발전되고 확장되는 것이었습니다.
라르슈 공동체 초기에 나는 '가정 생활의 분위기'를 창출하기를 주장했습니다. 나는 열두어 명의 장애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집과 가정들을 만들어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버림을 받고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다른 형제 자매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고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희망도 필요합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죽을 때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가련한 인생으로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각자의 본성 깊은 곳에는 이처럼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의 분위기에 대한 요구가 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인간적 희망이 좌절당할 정도로 상처를 받을 지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과 존재하고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 줄 동기와 희망에 대한 요청이 내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라르슈 공동체의 성장

라르슈에서 나는 인간적 측면에서 별로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복음은 맞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똑똑하고 잘난 체하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특히 보잘것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흔히 상처를 입고, 따돌림을 당하고,버림받은 사람들, 또는 어쩌면 어려운 위기의 순간들을 당하고 있거나, 인간적 능력을 별로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의식합니다.
12년 후, 라르슈라는 작은 나무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라르슈에는 여러 곳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웃고 우는 일상사를 통해 함께 노동과 기쁨을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라르슈의 사람들 역시 서로 다투기도 하고 해치기도 하며, 마음이 경직되거나 서로간에 장벽을 쌓기도 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르슈에는 가정 생활의 열기와 부모의 보호 그리고 여러가지 장애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 가족들로 부터 거부당하는 같은 고뇌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조차 멀리한 채 병원에서 오랜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멸시와 거부의 충격과 상처를 입었습니다.

 

라르슈 공동체의 조화

자신들의 존재 자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이 사람들과 보조자들이 함께 생활하는데, 이 보조자들 역시 여러 곳에서 모여 온 사람들입니다. 프랑스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적절한 교육을 받아 잘 짜여진 인격을 갖추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이상은 크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이끌어 나가고 관리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정확성을 잃고 남의 말을 듣는 데 무척 연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은 영감과 소명에 대한 응답의 차원에서 생활하지만, 가끔은 다소 감정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공동체에서 한 주일 동안 지내려고 오는 보조자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보조자들은 일 년 정도 머물기도 하고, 또 어떤 보조자들은 거의 기약 없이 머물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이 모두 조화를 이루며 함께 성장해 갑니다.

 

라르슈 대공동체와 가정공동체

온 세상은 작은 공동체들을 통해 큰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삽니다. 이 작은 공동체가 바로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먹고 잠자고 친구들을 맞아들일 수 있는 생활 터전입니다. 이모든 집에는 장애자들-나는 이 장애자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마음, 지적능력, 신경 체계, 신체상으로 장애자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열두 명 정도와(보통은 그보다 적지만) 서너 명의 보조자들-나는 이 개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보조를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할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장애인의 단순성과 순수한 애정이 '정상인'을 가장 크게 도울 때가 있습니다.-이 있으며, 이들에게는 수시로 도움을 주는 보조원 내지 작업장, 회계실, 의무실 등에서 일하는 보조자들이 딸리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한 집의 식탁인원이 20여 명,또는 방문하는 친구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트로슬리 지방에는 형태는 다르지만 대개 이런 집들이 15개 가량 있습니다.
이 다양한 형태의 가정들이 모두 하나의 소명과 공동 정신으로 연결되어 라르슈 대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트로슬리 지방의 이 라르슈 대공동체는 프랑스, 캐나다, 미국, 벨기에, 영국, 덴마크, 아이보리코스트, 인도 등지에까지 도처에 널리 퍼져 있는 거대한 라르슈 가정 공동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작은 가정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가정 공동체들은 같은 소명 의식을 마음 속에 느끼는 전세계의 수많은 동료들을 결합시켜 주는 바로 그 정신에 의해 거대한 가정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모든 공동체들의 희망- 그 분!

우리는 어떤 면에서 아주 보잘것 없는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고통과 기쁨이 놀라운 모양으로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 동동체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오직 공동체 생활을 하려고 애쓰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형제 자매가 되고, 그들과 더불어 삶의 여정을 가고 성장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자신의 결함, 결점,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충분히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의탁하라는 불림을 받습니다. 그분망이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럽게 변화시키시어 완고함에서 동정과 들음에로,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로, 이기주의에서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부추겨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이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으며, 모든 일상 생활을 통해 불가능을 다스리시는 그분 곧 예수께 마음을 열고자 노력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장 바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