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쟁이 예수
박총 (지은이) | 살림출판사| 2010-04-05
반양장본 | 312쪽 | 203*150mm | ISBN(13) : 9788952213822
목차
prelude 길들여지지 않은 예수 _반쪽짜리 예수를 넘어서서
욕쟁이 예수 1 _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욕쟁이 예수 2 _하나님 앞에서 쿨한 척하지 마라
양다리 예수 _‘하나님의 뜻’은 위험하다
술꾼 예수 _음/금주는 아무나 하나
겁쟁이 예수 _짝퉁 공포에서 진퉁 공포로
모노태스커 예수 _내 경험 속에 내가 현존하기 위하여
블로거 예수, 이어폰 꽂은 예수 _싸이월드와 MP3 플레이어의 영성
찍사 예수 _기독교적 사진 미학에 관하여
순결남 예수 _형제들을 위하여
연인 예수 _추억은 방울방울
철수 예수 _작명의 영성
interlude 날마다 죽는 예수
창조영성가 예수 _생태적 묵상, 비언어적 묵상, 오감 묵상
켈틱 예수 _한국 교회와 켈틱 영성이 입 맞출 때까지
파티보이 예수 _축제날 같은 인생을 살아라
원조복음집 예수 _너희가 복음을 아느냐
반골 예수 _Don’t Play the Game by Their Rules
세속국가주의자 예수 _대한민국이여, 세속국가로 영원하라!
스님과 함께 일하는 예수 _하나님의 은혜로서의 불교
투표하는 예수 _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동네 예수 _지역적인, 너무나 지역적인
웰빙 예수 _못나게 살아가려는 이들을 위한 노래
유색인 예수 _다민족 국가를 준비하는 노래
목수집 큰애 예수 _My Best Friend Was Born in a Manger
postlude 변두리 예수 _이 시대의 변두리 성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고마움을 흘려보내며
추천사
권정생 선생은 좋은 글이란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글이라셨다. 교회 안에는 너무도 지당하여 그 누구의 마음도 불편하게 하지 못하는, 그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착한 말들만 넘쳐난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분노가, 그분의 독설 속에 담긴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눈물겨운 사랑을 대언해 주는 ‘참 말씀’의 기갈 속에서, 다들 꺼내 놓고 말하기를 불편해 하는 주제들과 일상의
다양한 영역들을 이토록 훌륭한 균형감으로 풀어 낸 글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_민호기(소망의 바다, 찬미워십 대표, 대신대 실용음악과 교수)
일상의 희로애락보다는 천상의 무지개 이야기만 늘어놓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쓴 책은 대부분 듣고 잊어버리는 설교 같아서 잘 안 읽히거나 뻔한 내용이 많다. 그런데 박총은 다르다. 그는 우리가 살며 부딪히며 고민하는 주제들을 조금 과감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 놓는다. 삶은 치열하고, 생각은 진지하지만, 글은 발랄해 독자들을 즐겁게 만든다.
_서재석(Young2080 대표)
‘설거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농담이 치유가 되는’ 일상생활의 영성을 설파하는 저자의 영성이 극진하다. 유진 피터슨의 깊이와 켄 가이어의 섬세함과 도널드 밀러의 후련함이 버무려진 한 그릇 글 밥을 맛깔나게 차려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준비된 잔치 음식, 맛있게 드시라!
_안상현(미국 코스타 전임 훈련 사역자)
이런, 박총이 또 책을 냈다. 그는 매번 기상천외한 문장과 사고로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이번 책도 보아하니 내용이 과도한 흥미를 유발하여, 읽고 시험 들기 딱 좋으니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 그러니, 언론과 출판사는 제발 이 책의 등장을 선량한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_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박총은 ‘거친 정직함’이 ‘미끈한 경건함’보다 낫다고 판단하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주 잘 드러낸다. 제목에 대해 말하자면, 욕설에 대해 우아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미의식의 한계다. 욕은 인생의 뒤틀림과 고통, 아픔과 때로는 정의로운 분노를 거칠게 드러내는 하나님의 직설법이다. 하나님이 더 나은 진솔한 삶의 표현으로 욕설을 받아들이셨고, 또 선지자들과 예수님이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으셨다는 것을 박총은 놓치지 않는다.
_이문식(산울교회 담임목사)
저자
저술가, 사역자, 기독교 생태주의자인 박총은 10년간의 연애 끝에 한 몸을 이룬 안해(아내) 및 네 아이와 더불어 다복하게 살고 있다. 서울에서 국문학을, 토론토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 전도사로 사역과 밥벌이를 했고, 조만간 한국의 정겨운 골목과 뒷동산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 편집위원으로 있는 「복음과상황」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나누어 왔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밀월일
기』(복 있는 사람)를 썼다. 보수적인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문익환 목사를 가장 존경한다는 그는 자본(맘몬)과 국가(권세)의 지배를 거스르는, 생태적이고 정의로우며 자유롭고 영성 깊은 삶을 벗님네들과 더불어 꾸려 가고픈 바람을 갖고 있다. 나이 마흔에 ‘포에버 영(forever young)’을 외치며 밥 말리 티셔츠와 귀고리를 하고, 자식을 주렁주렁 달고도 현실보다 꿈을 좇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삶의 모습이 너무나 획일적인 한국 사회와 교회에 한줄기 숨통을 틔워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의 부모님과 지우들 및 독자들을 위해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있는 그의 미니홈피는 www.cyworld.com/philokalia 이다.
책 속으로
하나님의 뜻에만 ‘올인’하는 것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지표로 간주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이중적 긴장에서 발을 빼는 도피처로 악용된다. 단언하건대 예수 믿는 우리네 삶이란 긴장 속을 살아 내는 삶이다. 토머스 머튼은 ‘기독교 신앙은 확신과 평안의 원리 이전에 의문과 갈등의 원리’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긴장을 원치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교회와 세상, 은총과 자연, 내세와 현세 간의 팽팽한 장력을 기피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전자로 기울면 이원론이 되고 후자로 기울면 세속주의가 된다. 헌신되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원론을 선택한다. 이원론은 답이 딱 떨어지기 때문에 심령이 아주 편하다. 번민도 갈등도 없다. 교회에 대한 나의 헌신이 부족한 것만을 탓하면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더 이상의 영향력은 없다. 왜냐하면 긴장에서 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_본문 40-41쪽에서
세상의 언어, 혹은 제국의 언어는 ‘불가피성’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위험한 삶을 꿈꾸는 위험한 상상력을 억압하고 전복적인 삶을 감행할 용기를 봉인해 버린다. 하지만 내가 늘 감탄하며 읽는 월터 브루그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네 삶이란 불가능성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먹을거리와 입을 옷이 있다면 족한 줄 알라는 말씀에 ‘원시적’으로 순종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다스림)와 그 정의를 구하며 살아가다 보면, 도리어 돈과 성공을 구하며 살았던 이들이 꿈도 꾸지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역설을 삶으로 증명해 보라. 그것이야말로 예수 믿는 재미이자 짜릿함이 아닐까.
_본문 130쪽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고로 놀기 좋아해야 한다. 잘 놀다 보면 구원사역도 이뤄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삭개오를 정죄할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증오와 분열만이 더해졌을 뿐이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서 더불어 먹고 마실 때에 그가 변화되었고 그의 집에 구원이 선포되었음을 기억하라.
_본문 185쪽에서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그 법칙에서 파생된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세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을 의지하겠다는 겸손 아닌 겸손과, 이 복음아닌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 아닌 사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제시한 게임의 룰을 따르되 믿음으로 더 큰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게임의 룰, 즉 하나님 나라의 룰에 따라 게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제야 우리는 왜 주님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인지 알게 된다. 말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는 로마의 복음을 부러워하고 추구했던 것을 회개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돈과 성공과 일류대(최고급 유치원, 특목고, 8학군을 포함한)를 더 의뢰했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가르침 대신 어떻게 해서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려고 해 왔고(교회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서 섬기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섬기는 것만을 가치 있게 여겨 왔다),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대 주라는 말씀에는 ‘아멘’ 하면서도, 실제로는 강자 숭배의 로마를 따라 당하기 전에 먼저 때리고, 무시받기 전에 먼저 무시하고, 버림받기 전에 먼저 버리는 법을 가르쳤던 우리가 아니던가?
_본문 198-199쪽에서
대한민국은 기독교국가가 아닌 세속국가로 남아야 한다. 서울을 비롯한 모든 도시는 성시(holy city)가 아닌 세속도시(secular city)로 남아야 한다. 심지어 기독교인이 100퍼센트가 되어 만장일치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기독교국가로 선포하고 법을 기독교식으로 고치고 교육을 기독교화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 태어날 우리의 자녀 중 누군가는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교회를 떠날 수도 있고, 5천만 명 중 단 한 명이라도 내키지 않는 기독교 법을 지키고 달갑지 않은 기독교 교육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마따나 전체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힘을 가진 한 사람이 전체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다.
_본문 222쪽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조금만 더 가동해 보면 하나님이 아기로 오셨다는 그 익숙한 사실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를 신령한 젖과 땅의 소산으로 친히 먹이시는 엘 샤다이(젖가슴을 지닌 하나님)의 하나님이 한 여인의 젖을 빨아 생존과 성장을 도모한 이 역설,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를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엘로이(하나님이 감찰하시다)의 하나님이 요람에 눕혀져 그 몸짓하나 하나가 육신의 부모에게 감찰되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모든 허물을 씻기신 여호와 카데쉬(여호와가 거룩하게 하시다)의 하나님이 사람의 손에 의해 몸이 씻기고 똥오줌이 닦이는 역설, 인간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는 여호와 이레(여호와가 준비하신다)의 하나님이 인간 부모의 손에 모든 필요를 공급받게 된 역설, 인간에게 평화를 주시는 여호와 샬롬(하나님은 평강이다)의 하나님이 사람의 자장가를 들으며 평화롭게 잠든 이 역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_본문 286쪽에서
'보고 듣고 읽고 > 또 보고싶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만 위로할 것! - 김동영 (0) | 2011.01.26 |
---|---|
결혼 23주년에 선물로 고른 책-'힘들땐 그냥 울어' (0) | 2010.09.04 |
보아야 보이는 것들- 서편제 김명곤님 (0) | 2010.03.13 |
흙담집의 예언가 이지함 - 광기와 방랑의 자유인 33인의 이야기 중에서 (0) | 2010.02.07 |
넓은 하늘 아래 나는 걸었네 - 광기와 방랑의 자유인 33인의 이야기 (0) | 2010.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