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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 예수' 영화를 보고 (1)

희망으로 2009. 2. 14. 15:15

'나자렛 예수' 영화를 보고 (1)                    김 재 식
                                
 프랑코 제피렐리 제작과 로버트 파우엘이 주연한 '나자렛 예수'를 약 10년전에 본 감동을 못잊어
대여해 장장 6시간을 보았다.

10년전 보았을때 느꼈던 신나는 예수의 이미지에 더하여 이제는 전율을 주고 가는 예수의 말씀의 깊이,

앞뒤가 일관성 있고 그 속에서 바닥없이 무한히 뭉클한 애정들, 깜박 잊고 지내는 생명있는 예수를 찾은 듯 했다.

성경과 해석과 종교의 온갖 이미지들로 둘둘 말린 예수의 겉옷을 다 벗겨내고

뜨거운 가슴을 마주대하는 감동으로 주요한 느낌을 받는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마리아의 역할로 나온 올리비아 핫세와 요셉의 탄생기 부분은 요셉이 성령잉태의 사실을 받아 들이는 부분이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비교가 되었다.

세례요한은 언제 보아도, 언제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일꾼으로는 더할 사람이 없겠다고 느껴지는

온 생을 바쳐서 겸손하고 용기있게 일한 완전한  사람이었다.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
광야의 시험을 거친 예수가 베드로를 만나고,

베드로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예수를 따르는 장면은

차라리 성서를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을 했으면 할 정도로 가슴에 와 닿았다.

한국교회가 대부분 가르치듯 나를 따르라에 "예"하고 기다렸다는 듯 한점 고민도 없이 그물도 가족도  다 팽개치고 쪼르르 따라 나왔다는 식은 여지껏 석연찮은 조금은 불만이었다.

베드로의 일생을 돌린 결심과 순교로 이어지는 그 귀중한 선택은 이 영화에서는 그런 식은 아니었다.
예수의 시킴에 따라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를 배가 넘치도록 잡는 기적을 겪고

뱃사람의 경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능력에 경외하고 되고 예수를 인정하지만

온갖 손때가 묻은 고기잡이 배와 그물들을 못잊어하고 가족과 생계에 대한 염려를 떨치지 못하여

예수를 따라갈 수 없다고 요한과 야고보에게 나를 내버려두고 가라고 갈등섞인 짜증을 낸다.

하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예수와 같이 다닌 시간의 회상과 예수의 자신에 대한 관심,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나서자는 부름이 이미 베드로의 가슴속을 뒤흔들어 놓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예수를 찾아 나선다.

고기철이 아니니 당분간 따르고 고기철이 되면 다시 오리라는 자기 자신에게도 확신이 없는 명분같은 것을 달면서...
그가 얼마나 자신의 생업에 충실하고 자리 잡은 능숙한 뱃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하면

예수를 따르고자 갈랄리 호수와 가족을 떠난 것은

오늘날 온갖 생활에 얽매어 예수의 제자된 삶은 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세리 마태오와 예수의 만남)
세리 마태는  자신의 생활을 아무런 신선한 의욕도 없이 뭇사람의 비난과 조소속에 재물과 방탕, 탐욕으로 보상하듯 뭉개고 살았다.

그런 세리 마태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궁금해서 그자리에 왔다가 다른 사람들로 부터 손가락질을 받지만 그는 늘 당하는 일이라 태연하다.

예수외 눈이 마주친 그는 무엇인가 느끼지만 타성으로 넘어간다.

예수를 우습게 표현하고 그때문에 화가난 베드로가 세리 마태오의 멱살을 지고 욕을 한다.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세금을 악랄하게 받아내는,

인간도 아닌 존재라고 취급하며 싸울뻔 하지만 주위의 만류로 손을 놓는다.

베드로와 세리 마태오 사이의 적개심과 미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래 묵은 갈등이었다. 이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예수는 세리 마태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들에게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료"

 

말없이 돌아서는 세리 마태오의 등 뒤에서 기적과 같은 놀라운 말이 들렸다.

"마태오!"

 

세리 마태오는 멈추어 섰다.   

"당신의 집이 얼마나 멉니까. 오늘 저녁은 당신 집에서 머무르고 싶은데 되겠소?"

세리 마태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위의 제자와 사람들도 모두 믿을 수 었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죄인으로 취급하고,

창녀와 동등하게 대하는 세리의 집에 존경하는 예수가 제발로 가겠다고 초대해 달라고 하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리 마태오는 돌아섰다.

이미 가슴속의 상당한 충격과 감동으로 상기된 얼굴로

 

"와 주시겠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세리 마태오가 돌아가고 예수는 모임을 끝낸후 세리 마태오의 집으로 향하였다.

베드로는 자기 배가 있는 곳으로 가버렸고 이런 예수를 수용하기가 힘들고 믿고 따라가기가 갈등이 왔다.

예수가 세리 마태오의 집으로 가는 동안 제자들이 계속 옆에서 만류했다.

 

"예수님,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가면 온갖 사람들이 다 비난을 하고 떠나갈 것입니다.

율법에도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의 집에 가까이 하면 불결해진다고 부정을 씻는 예를 지내게 되어있는데... 예수님 가지 마십시요"

 

그러나 예수는 웃기만 할 뿐 대답없이 세리의 집 문앞에 왔다.

세리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온갖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유흥과 여자들과 노래가 어지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예수, 순식간에 집안의 시선이 집중되고 잠잠해졌다.

뜻밖이었다. 같은 집단들이 아니고는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없던 전례에 예수의 방문은 놀라운 사실인 것이다.
세리 마태오의 반가움과 충격은 더욱컸다.

설마 오기야 할까 반신반의 하던 차에 예수의 방문은

마치 긴 암흑 터널같은 생활에 가는 한 줄기 빛 같은 새로움 이었던 것이다.

자기의 자리에 예수를 앉게하고 옆에있는 창녀를 물러가게 했지만 예수는 그대로 앉아있게 했다.

좋은 음식을 내어 놓고 예수의 이야기를 듣기를 청했다.


베드로는 문밖에서 들어오지는 못하고 어쩌지 못한채 집안을 들여다 보고만 있었다.

예수는 들어오지 못하는 제자와 베드로를 가끔 바라보며 눈길이 마주치면서(의식하는듯, 그들에게 이야기 하듯)

예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시작했다.

 둘째아들의 방탕생활, 굶어 죽게되어 고향과 부모생각에 돌아오기로 결심하는 이야기,

문앞에 돌아왔을때 아버지가 기다렸다가 반기는 대목.

특히 큰아들이 일터에서 돌아와 아버지에게 항의를 하는 부분에서는

예수는 자주 베드로에게 눈길을 보냈고 베드로는 무었인가 자꾸 목이 메이는 모습 이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내것은 다 네것이었고 둘째는 죽었다가 살아 왔으니 우리가 환영을 하여야 하지 않겠냐는 대목에서

베드로는 세리의 문간을 넘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오랜 미움과 갈등의 벽, 이론의 높은담이 무너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백성이 세리의 집안으로 자청해 들어온 것이었다.

 예수 앞에까지 온 베드로는 고개를 떨구고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예수님, 제가 옹졸했습니다"

 

사나이의 큰 덩치에서 눈물이 핑도는 순간이었다.

예수는 말할 수 없는 반가움으로 미소를 지으며 베드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체온이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이어 베드로는 세리 마태오에게로 다가갔다.

세리 마태오는 당황해지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세리 마태오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오가는 화해의 기운만이 온 집안을 동았고

다른이들이 문을 넘어 주춤주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