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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루살기를 결심하면서…’
최근에 ‘나는 사별하였다’라는 책을 읽었다. 배우자를 사별하고 남은 사람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온갖 감정과 괴로움 슬픔을 4사람이 서로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이다. 이들은 사별한 사람들이 모이는 사별카페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서로 털어놓고 위로하며 나눈 글을 정리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나도 그 심정들이 궁금하고 어쩌면 나도 곧 그 대열에 설 사람같아 내용을 보고 싶어 가입하려고 했으나 자격이 안되어 가입을 못했다. 이미 사별한 사람만 가입이 되고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도 있었다. 나는 아직 사별대기자? 그런 분류에 속하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대신 그들이 펴낸 책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고보니 우리 모두는 ‘사별대기자’에 속한다.
미국 워싱턴의대의 토머스 홈스와 리처드 라헤 교수가 정신적 충격에 따른 스트레스 점수를 매긴 적이 있다. 해고 47점, 질병 53점, 감옥 수감 63점, 이혼 73점 등이다. 최고의 스트레스 점수인 100점은 배우자의 죽음이었다.
또 다른 기관에서 이별이 주는 고통의 수치를 연구논문에 발표된 것을 보았는데 배우자를 사별하고 겪는 스트레스와 고통이 100점이었다. 친구가 35점, 그냥 친인척이나 가족중 한명일 때가 65점 수준대에 비하여 아주 높다는 결론이었다. 공감하고 그럴거라 믿어진다. 특히 나의 경우는 좀 더 그렇다.
내가 죽음과 이별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건너지 못하며 산지가 십수년이 되었다. 그 동기는 마냥 비관적인 감성때문도 아니고 그냥 호기심이나 지식을 쌓는 차원에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중환자실에서 죽기 직전의 상태인 아내를 곁에서 느낀 것도 두어번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체념한 기준으로) 발을 동동구르며 응급실로 들어가며 제발 죽지만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적은 셀 수도 없다.
심지어 두 번은 아내가 죽은 것으로 받아 들인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차 안에서 거의 30분 이상을 숨소리도 안들리는 미동상태로 있다가 다시 깨어난 경험이다. ‘잘 있어라 그동안 고마웠다’는 아내의 마지막 인사까지 듣고 멍하니 운전석에 앉아 머리를 묻고 시간이 흘렀다. 서울로 가는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를 세워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이어 벌어진 일이었다. 거의 실전에 가까운 모의훈련을 한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사별하였다’ 이 책에서 사람마다 다른 버티는 방법, 힘겨웠던 순간들을 볼 수 있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100% 사별의 운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이런 사별의 고통은 참 잔인하고 속수무책이라는 점이 더 마음을 무겁게 했다. 결코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터무니 없는 위로라는 명목의 상처를 주기도 하는 한계를 보기도 했다. 배우자를 상실한 그 고통의 감정과 상태는 다른 이별 정도와는 또 다른 것인데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없이 던지는 말이나 머리로 만든 논리는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500명이 조금 넘는 이 사별카페의 회원들이나 공동집필한 4명의 저자의 경우 일반적으로 장수하고 보통 자연수명을 다한 죽음, 흔히 호상이라는 표현의 상실과 달랐다. 이들은 대개는 암과 질병, 사고로 일찍 배우자를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준비가 안되고 전혀 짐작도 못한 채 맞이한 사별로 따라오는 후유증이 대단히 큰 사람들이었다.
죽음, 우리는 이 정체를 잘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닥치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폭풍을 몰고 온다는 걸 경험한다. 사람은 다 죽는거 아냐? 라며 대범하게 받아들일 것처럼 평상시에는 말하지만 그 상실이 배우자고 더구나 자연적 사별이 아니라면 엄청난 구덩이가 그 자리에 생긴다는걸 이들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준비를 더 많이 하고 마음 시뮬레이션을 더 자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연습하고 대비해도 정작 닥치면 다른 차원을 경험하더라고 사별자들이 증언한다. 나는 또 다른 모습의 죽음을 준비하지만 이 대상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배우자가 아니라 내가 죽음의 당사자가 되는 경우 말이다. 이 문제는 경험자도 없다. 할뻔한 사람들은 있지만 그것은 죽음의 완전한 경험자가 아니고, 진짜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절절한 증언을 할수있지만 이들은 아예 말을 못하니 전해지지 않는다. 사후세계를 체험한 사람의 간증이나 학자들의 주장은 있지만 그것은 조금은 공허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후세계의 진실이나 목격담이 궁금한 것이 아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정말 필요한 마음준비를 어떻게 하고 무엇을 중점으로 준비할 것인가 그게 궁금하다. 그 과정의 두려움, 고통이 어떤지,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지 경험을 듣고 싶은데… 아마도 영원히 불가능하지 싶다.
죽음을 늘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바탕에 두고 하는 것이다. 사는 게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은 죽음의 세계나 좋은 죽음이라는 관심 자체가 없을 수 있다. 평안하고 행복한 죽음은 평안하고 행복한 생명의 삶을 산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후회와 슬픔, 두려움이 없는 죽음을 맞고 싶은 이유는 바로 그렇게 살다가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오늘도 다시 결심한다. 하루씩 사는 하루살이가 되기로. 마음만이 아니라 생활에서도 가능한 것은 준비를 한다. 내가 떠나면 의미없고 쓰레기가 될 살림을 줄이고 다시는 하지 못할 사과와 반성을 미리하고 용서도 하는 구체적 행동을 포함한 죽을 준비를. 하루살이에게 내일은 언제나 죽음의 시간이다. 내일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넌센스고 어쩌면 미련한 죄악이다. 그것이 생각으로 인한 근심이나 욕심, 불신이거나 혹은 보이는 물건이나 살림이나 무엇이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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