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기도 21 -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못믿겠어요!’ 했는데…
불신의 영향력에 대한 심리를 조사하기 위해 이런 설문을 한다면 답이 어떻게 나올까? 밥이 백그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먹으면 한시간 안에 반드시 죽는 독이 들어 있다. 아무 냄새도 색도 없어서 구별이 안되는데 배는 너무 고프고 다른 아무 먹을 게 없으면 어떻게 할지, 백그릇에 단 하나이니까 요행을 바라고 먹을지 안먹을지를. 대답은 어쩌면 거의 전부가 어느 그릇에 독이 있을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안먹겠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현상이 또 있다. 학급에서 한 학생이 가지고 있던 돈을 분실했다고 선생님께 말하면 학급의 전 학생이 가방 검사를 받게 된다. 혹은 모두 눈을 감게하고 돈을 가져간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손을 들라고 한다. 그냥 돈만 회수하고 넘어가주겠다고 하지만 손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뒤에 끝내 돈을 훔쳐간 사람이 밝혀지지 않으면 모두가 혐의자가 된다. 서로 혹시 저 아이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 돈 씀씀이가 늘어나거나 조금만 이상한 행동을 보면 추측을 거쳐 도난과 연결해서 수군거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학급생 전부가 불신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불신은 단 하나만 던져져도 전부가 뒤집어 쓰게 된다. 그만큼 불신의 힘은 크고 깊게 퍼진다.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모든 대상에는 기본적으로 의심을 하는 본성이라도 있는걸까? 어쩌면 불신의 특성 자체가 확실하지 않은 ‘어쩌면…’이나 ‘아닐까?’ 같이 애매함을 바탕으로하는 것이고 그래서 전파력이 더 강한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에 숨어 있는 악한 기운이 힘을 얻기 좋은 먹이다.
불신의 또 한가지 특성은 의심하는 쪽이나 의심받는 쪽이나 제3자들에게는 양쪽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동업을 하던 친구사이가 어느날 서로 멱살을 쥐고 서로 자기를 속였다고 싸우면 그 진실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다른 사람들은 그 두사람 모두를 상대를 속인 나쁜 놈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다툼도 말하는 사람이 옳아보이지만 옮겨 들어보면 그 사람 말도 맞는 것 같아서 판별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아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혹시 내가 너무 힘들고 좌절감에 빠져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계세요? 있기는 있나요?’ 라는 말을 중얼거리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그들은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될거다. 어떤 이는 내가 없는 하나님을 있는줄 알고 속아서 믿다가 낭패를 당한다고 볼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하나님도 나도 둘 다 사기꾼이거나 바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있거나 혹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알 수가 없으니 둘 다 불신의 대상이 되는 거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 없다고 말하면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시한다. 안믿는 사람이 하나님 없다는데 새삼 별나게 볼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고 기독교인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하면 그건 다르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사람, 둘 다 못믿을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있다고 하다가 없다고 하면 하나님도 사람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생전에 함께 다니던 도마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후 다시 나타나셨을 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다. 살아 생전 미리 이야기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 순간 예수님의 존재만 불신 당하는 게 아니라 도마 자신도 불신의 수렁에 빠질 위기에 처했다. 다시 살아 나타난 예수님을 못믿는 건 죽기 전 예수님의 말도 못믿는다는 거고 그 예수를 따라다닌 도마 자신의 결정과 행적도 불신되어 버리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수님은 그런 도마를 나무라지 않고 손과 발의 구멍난 상태를 확인 시켜주고 두 사람 모두 불신의 파멸에서 벗어나 참 믿음의 관계로 회복되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 모르게, 때로는 하나님도 모르게 못 믿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딸아이가 카톨릭이 운영하는 대안고등학교에 입학신청했을 때 꼭 되어야했고 될만한 성적이었다. 그런데 탈락을 했다. 그때 나는 무지 낙심하고 하나님이 야속했다. 당시 아내와 나는 병원서 지내고 딸은 오갈데도 방 한칸도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를 운영하고 일년내내 지낼 수 있는 그 학교 입학이 너무도 절실했다. 그런데 딸아이보다 성적이 좀 낮았던 같이 지원한 중학교 친구는 합격하고 딸은 낙방이었다. 그 충격과 낙심은 컸다. 하나님이 외면하던지 안계시던지 둘 중 하나만 같았다.
그후에도 아내가 많이 나빠져 응급실로 갈때 중환자실은 안가게 해달라고 기도 했는데 결국 중환자실로 들어 갔다. 처음 진단 받을때부터 이것만은 피하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는 번번이 빗나가고 나빠졌다. 병원비에 쪼달려 내일이 오는 게 막막할 때도 그랬다. 그럴때마다 나의 믿음은 안개가 심해지고 불신이 스물스믈 피어올라 남들 몰래, 하나님도 몰래 중얼거렸다. ‘하나님, 계신거 맞아요? 자느라 못 들은건가요?’ 그랬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내가 종종 못믿을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말해버리면 그 결과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하나님만 욕먹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과 나 양쪽 모두 사람들에게 믿지 못할 대상이 되어 욕을 먹는 처지에 빠지는 걸 몰랐다. 그렇다고 수시로 몰려오는 의심의 때마다 거듭 반복해서 예수님께 상처난 몸을 요구할수도 없고 그것은 건강한 믿음의 사이에서 가질 태도는 아니다.
부디 믿고 기도하면서도 신뢰와 불신의 양쪽을 오가는 변덕스런 심성을 고쳐주시기를 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피해서 원천적 불신자가 될 작정이 아니라면 거듭 하늘과 땅의 우리 관계가 비신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는 대상으로 보이게 해서는 안된다. 단지 기도의 응답이 내가 정한 타이밍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조급성 때문에 계속 그런다는 건 더더구나 내가 잘못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기독교 신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하나님만이라도 온전히 신뢰를 받도록 해드리는게 한때 기독교 신자였던 사람으로 매너있는 행동일거다. 아니라면 온전히 끝까지 믿으며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기독교 신자로 살면서도 불신의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백그릇의 밥중 독이 든 하나가 되어 99그릇의 밥도 못먹는 음식이 되게 하는 것과 같다. 또 친구의 돈을 훔치고 입을 다물어 학급의 나머지 모든 친구를 도둑의 혐의를 가지고 살게 만드는 것과 같은 짓이다.
‘약한자여, 그대 이름은 믿음 없으면서도 기독교 신자로 버티고 사는 염치없는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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