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기도 26 - 도대체 선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저 기도 26 - 도대체 선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돈을 받고 인력거를 끌고 태워주는 사람은 돈을 내고 앉아서 가는 사람보다 못난 것인가?
이른 아침에 나와 사람들이 오기 전에 화장실이랑 계단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그 청소된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보다 천하고 아랫 사람인기?
큰 교회를 걸어서 온 평신도는 비싼 고급차를 타고 교회로 온 목사보다 더 낮은 자세로 허리숙여 인사를 해야하는 신분 낮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이론과 머리는 아니라고 어렵게 대답을 하는데도 현실에 연결된 감정은 그렇다고 느낀다. 심지어 음식이나 마트의 장본 물건을 배달온 사람에게도 불만사항이 생기면 식당 종업원 대하듯 만만하게 짜증을 낸다. 고분하지 않으면 다른 집으로 단골을 옮겨 버리겠다는 협박의 그림자를 비치면서…
험한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는 사람은 좋은 옷 입고 사무실에서 관리를 하는 사람보다 좀 더 막대하고 말을 높히지 않아도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편견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정말 그럴까? 직업에 귀천이 없고 신분제도도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직급 노동종류 맡은 일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공평하다는 사실을 머리는 안다. 하지만 마음속까지 차별없이 그렇게 대접하는 경우는 말보다는 드물다.
하물며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어떤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로 보이는 비신자, 죄인 무리로 보는 직업별 대상에게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무시하고 낮추어보기도 한다.
유대민족에게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만으로도 해상도 높은 티비로 화면을 보듯 선명하다. 아파트 평수만 넓어도 좁은 서민 아파트 사는 친구는 사귀어서 안된다는 부모도 있고 당사자인 싹수노란 애들도 있는 세상에서 살면서 그 차별의 분위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데 어디 불행이 신분과 민족을 가려서 올까? 직위와 분야를 가려서 화재나 강도를 당할까? 그 당당하다던 사람도 사고를 당한 처참한 상황이 되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자기를 도와줄 손길을 골라가며 받을 수는 없고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단지 성경속에서 짐짓 교훈적으로 보이려고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면 지체없이 팔을 걷어부치고 뛰어 들어 힘을 모으는 건 늘 무시당하고 어쩌면 억울하고 복수의 분노를 쌓았을지 모를 보통 사람들이다.
그건 힘들게 살아 본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기가 겪어보았기에 남의 어려움도 이심전심 공감이 빨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힘없는 사람만 가지는 무슨 태생적인 유전자나 본성때문이 아니라 환경과 일상에서 생긴 선한 반응일지도.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성전을 들락거리는 신자는 ‘거룩한 성도’ 라던가 ‘선택받은 자녀’ 등 스스로 구별하는 습성이 지나쳐서 자칫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종종 그 허상을 깨는 미담 뉴스를 대할때마다 정신이 퍼뜩 든다.
강도 만난 사람을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부자는 다 지나치는데 가던 길을 멈추고 가진 돈을 다털어 돕고 치료하던 사마리아인의 성경이야기가 생각나서. 그건 심심할 때 들으라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안고치는 겉만 거룩한 얄팍한 무리들에게 주는 경고다.
진짜 거룩하고 선별된 성도는 사랑을 잃지 않은 사람만이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진짜 거룩한 신자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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