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기도 9 - 다시 순례의 길로 합류해야…
그저 기도 9 - 다시 순례길로 합류해 걸어야겠습니다
아픈 곳 없고 배고프지 않고 일상이 좀 덜 괴로우면 잊게 되더군요. 감사도 겸손도 사라지고 우리 영혼을 자유케 하신 큰 뜻도 까먹지요. ‘아, 하나님 없어도 다 가능하네? 내 힘으로도 잘 살 수 있겠다!’ 어깨 올리고 목에 힘 들어가고 무슨 결정을 하든지 혼자 해버리지요.
사실 그렇게 흘러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심하게 고통스러운 상황이 아니면 대부분의 경우 무심해지고 별로 걱정도 안하는게 사람들이 가진 본성입니다. 갈증이 심하지 않으면 마실 물이 근처에 늘 있다는 고마움도 잊고 살지요. 당장 2-3분만 공기가 없으면 질식하고 죽는데도 평생을 마시고 살면서도 그 큰 다행을 기억하는 사람 거의 없는 것처럼.
화장실 갈 때의 급한 심정과 볼일을 보고 난 후 돌아올 때의 심정은 많이 다르지요? 그 전에는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고라도 화장실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협상할테지만 속편해지고 나면 느긋해져서 쉽게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생긴 말이 뒷간 갈때와 올때가 다르다! 입니다. 우리가 늘 그런 습관적 본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생활은 그러다가는 필연코 고난에 휩쓸리고 예정된 구덩이에 빠지지요? 그런 성품 그런 일상이 필히 가져올 비극이 법칙처럼 일어나니까요. 시기심,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한 분노, 짜증, 무리한 시도 등은 사람사이의 관계에 인과관계를 부르고 누적되면 언제인가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공기가 든 풍선을 계속 누르면 어느 순간은 터지거나 반동으로 튕겨져 나오는 게 물리적 법칙이듯 일상의 법칙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가장 몸에 가깝게 나타나는 증상은 허무와 권태입니다. 곁의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일로도 일어나는 공연한 미움과 짜증들입니다. 나 중심의 일상은 처음은 편한 것 같고 이익이 큰 거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작용이 점점 세게 돌아옵니다. 꼭 무슨 다툼이 있어서가 아니라도 내 안의 기쁨과 평안이 메말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정은 결코 남과 경쟁에서 이기거나 내 손에 뭔가를 얻어야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눠주고 배려하고 양보할 때 더 크게 느끼는 감정들입니다.
내가 그런 삶에서 좀 멀리까지 흘러가고 자신을 돌아보는 점검이 무감각해졌다 느껴지면 그 시기가 다시 돌아가야할 때입니다. 더 방치하면 기어이 큰 사고가 터지고 불행의 회오리에 말리는 게 뻔합니다. 광야를 헤맨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꼭 겪고 당해야 정신차리는 반복이지만…
다행인 것은 처음 기억을 아주 잊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내 모든 일상의 과정과 결과를 하나님께 기대고 마음 비우고 편히 잠들던 복의 시간,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럴때면 동시에 순례의 길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위험을 느낍니다. 빨리 제 자리로 돌아와서 순례자의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야겠다. 그런 회복의 마음이 밀려옵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는 마지막 은총입니다. 아주 버리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자비입니다.
그래서 다시 추스립니다. 옷길을 여미고 신발끈을 다시 조이고 본래의 길로 합류하려고 결심합니다. 잠시, 자주 길을 벗어났던 미안함과 그 결과 조금은 지친 심신을 의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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