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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기도 8 - 만나면 좋은 친구? 행운이 아닌 동행자

희망으로 2022. 6. 22. 00:15

‘만나면 좋은 친구? 행운이 아닌 동행자’

‘만나면 좋은 친구 ㅇㅇㅇ  ㅇㅇ방송’ 그 로고송이 한동안 사람들의 흥얼거리는 노래가 되었었다. 은근히 중독성 있는 홍보 노래였다. 어쩌면 아주 뛰어난 가락이라서가 아니고 가사 내용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만남, 좋은 친구, 그 단어가 가지는 느낌이 자꾸 흥얼거리게 한 것 같다. 내 생각에는…

만나면 기쁘고 뭔가 좋은 느낌이 들게하는 친구가 있다면 분명 행운아가 맞다. 이 각박하고 날마다 경쟁으로 날선 사회를 살면서 그런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다 힘들고 슬픈 일을 당해도 만나면 위로를 받고 응원을 해줄테니까.

결혼하고 얼마 안된 시기였다. 직장에서 무한경쟁과 피를 말리는 실적 목표로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울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서로를 밟고 이겨야 겨우 자리를 지키고 실적을 채워야 문책과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시대였고 사회였다. 지금이라고 아주 다를 건 없지만 나이들어 최전선에서 좀 멀어져 이제는 실감이 덜 난다.

그래서였을까? 좋은 친구도 그립고 따뜻한 환대를 주고 받는 그런 만남, 그런 사람이 많이 그리웠다. 다른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회사 동료끼리도 보이지 않는 경쟁과 긴장의 대상이 되곤 했으니까.

두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내게 그런 바람이 유난히 많았던걸까? 그래서 아들 이름을 ‘기쁨’이라고 지었다. 부르는 사람이나 불리는 아들이나 서로 뭔가 기분좋은 밝은 느낌을 가지면 좋겠다 싶었다. 중학생때는 잠깐 여자 이름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들도 자기 이름을 좋아 해주었다.

세상 누구도 자식 이름이나 상호를 ‘슬픔’이라고 짓는 이는 없을거다. 그만큼 슬픔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도 않고 피하고 싶은 이름이다. 단어만 들어도 어쩐지 웃음기가 사라지고 무거워지는 감정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단어만 듣고도 감정이 가라앉는데 실제로 슬픈 상황을 만나면 얼마나 힘들까? 어떤 사람들은 슬픈 분위기가 싫어 그런 종류의 무거운 줄거리 다큐멘터리 방송도 아예 외면하고 채널을 돌려버린다고 했다. 미담만 보고 듣고 잔치집만 가고 초상집도 안간다는… 그건 악하다기보다는 두려움을 못이기는 약한 사람축에 속할거다.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대응이지만.

누구나 좋은 일만 만나고 그 속에서만 살고 싶지 않을까? 부득이 마주치고 피할수없으니 돕고 위로를 하는 것이지 좋아서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점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우는자와 함께 울겠다고 하셨다. 피하지 않고 외면도 않고 오히려 기쁜 사람 웃는 사람보다 더 챙기셨다. 놀라운 행동이고 아름다운 동행이셨다.

살면서 기쁜 일만 생기고 좋은 친구만 만날 수는 없지만 그런 본을 보인 분과 함께 이 길을 간다면 기운이 날 것이다. 두려움과 가라앉는 좌절을 견디고 위로와 응원을 나누면서 남에게 좋은 친구로 동행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는 부족한 행운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좋은 행운이 된다면 그것도 기쁨이 될것이다.

예수님을 몰랐다면 좋은 일 좋은 친구만 만나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었을 거다. 그런 위태로움을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면서 어떤 일을 만나도 헤치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능력보다는 예수님의 능력과 큰 힘을 의지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 결과가 뭐 예수없이 행운아로 태어난 것과 비슷한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엄청나게 다른 점이 있다. 행운은 바닥나고 끝나는 즉시 속수무책 파탄이 기다리지만 예수님과 같이 가는 길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을테니 우리를 영원한 행운아로 만들어 준다. 그런 변함없는 가능성을 주시는 분을 만난 그 자체가 최고의 행운일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