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기도 7 - 무지개, 미소로 나타난다
그저 기도 7 - 미소는 슬픔을 지우는 무지개
월요일 새벽이면 정동진 산속 기도원의 주차장에서 출발했다. 그래야 충주에 있는 직장의 출근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5일 일을 마치고 금요일 퇴근 후 병든 아내가 있는 강원도 정동진의 산속 기도원에 돌아오면 늘 녹초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교대로 엄마를 돌보라고 부탁하고 생업에 필요한 돈을 벌기위해 그렇게 장거리 출퇴근하며 일을 하던 시절이다.
그 한 주간동안 아무 사고없이 지내준 것만으로도 무지 고맙고 병 증상이 나빠지지만 않으면 감지덕지다. 병 자체가 더 나아지기는 기대하기 힘든 상태라 더 그랬다. 운전하고 오는 동안은 긴장을 하느라 몰려오는 피로도 버텨야했다. 그런데도 도착하면 또 다른 고단함이 기다리고 있어서 늘어질 수도 없었다.
아내가 사용한 각종 의료용품과 쌓인 기저귀를 처리하고 밀린 빨래도 해서 널어야 했다. 약도 더 사오고 소변 배변을 위한 좋은 여러 건강용품과 먹거리도 사서 채워놓아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 자리를 비운 뒷처리와 다음 일주일을 또 비울 준비를 하다보면 주말이 빠르게 지나가고 쉴 틈이 넉넉하지 않았다. 늘 잠이 부족했다.
달랑거리는 지갑에 한숨쉬며 빠르게 닥치는 기도원의 밥값 숙박비를 마련하는 것도 고민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몸은 천근만근 같은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불면이 그냥 잠이 안오는 정도가 아니라 눈 뜬 채 목이 졸리는 가위가 눌리는 경험을 하는 불면증상이었다. 욱 치밀어오르는 서러움과 이유모를 분노까지 더해지면 위험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엎치락덮치락 오지 않는 잠과 씨름을 하다가 더는 참을 수 없으면 밤 몇시인지 새벽인지 상관없이 기도원 성전으로 달려갔다. 슬리퍼를 끌고 들어서는 예배 성전은 싸늘한 한기와 캄캄한 어둠만 가득찬 마루 운동장 같았다. 방석 두어개를 가져와 하나는 깔고 하나는 무릅에 덮고 엎드려 기도를 했다. 사실은 퍼졌다는 말이 더 맞을 자세로.
‘하나님! 제발 잠을 좀 자게 해주세요! 아님 아픈 아내를 낫게 해주던지요! 그것도 아니면 필요한 돈을 좀 주시던지요! 더는 못살겠어요. 나더러 뭘 하라는건가요?’
대개는 할 말 못할 말 실컷 쏟아놓으며 어떤 때는 울다가 잠들고, 어떤 때는 맘이 좀 달래져서 평안히 잠들고 했다. 그런데 신기했다. 아무 소리도 안들리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곁에 없는데 마치 온수 라지에타를 털어놓은 듯 스르르 따뜻해지는 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피로가 몰려오면서 잠에 들곤 했다. 눈 뜨면 새벽 여명이 밝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곁에는 아무도 없고 차가운 적막함뿐이었다.
그때 그 어둠속에서 서럽고 슬프면 부르는 이름은 늘 주님! 예수님! 이었다. 마치 빚 받으러 온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따지듯 그랬다. 매달리고 하소연도 하고 미워서 원망도 하는 그 대상은 늘 예수님이고 많이 짜증난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 말투로 그랬다. 내가 예수님이었더라도 얼마나 들어주기 귀찮고 괴로웠을까?
이상한 경험은 기도하다 잠들기 직전마다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 애매한 기억이 나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가냐? 늘 니 곁에 있는데… 니가 이렇게 서럽고 슬퍼서 울면 내 마음은 더 아프고 슬프다. 니는 모르지? 뭘 해주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어야하는 이 괴로움을…’
그런데 그 말이 바깥이 아니라 내 속에서 들렸다. 누가 내 머리나 심장에 몰래 녹음기를 이식해놓았나? 의심이 갈 정도로 어떤 때는 더 생생하게 들리기도 했다. 내가 늘 곁에 같이 있다는 그 말이… 걸어가도 멀어지는 게 아니라 같은 크기로 들렸으니.
그 당시 나의 믿음은 그렇게 서러움과 슬픔때문에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더 잘 알게 되었다. 불과 몇달의 시간동안이 그 이전의 30년동안 교회생활하며 가까워진 것보다 더 빠르고 더 깊이 만난 것 같다.
이후 아내의 병이 더 심해지는 바람에 119를 불러 상급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렇게 들락거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도심의 재활병원으로 옮기고는 또 다른 경험을 했다. 온갖 상황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모인 재활병원은 거의 반쯤 지옥같은 곳이었다. 희망을 가진 사람부터 절망에 찌든 사람까지 단계별로 모두가 있었다.
한 번은 아주 밉상으로 늘 험한 말과 시비를 달고 살던 아주머니 한명이 복도끝 의자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주머니를 싫어하고 나도 싫어했다. 너무 사납고 억지를 부려 종종 다툼이 일어나고 그래서 다들 슬슬 피했다.
그런데 뭔 서러운 일이 있었는지 우는 소리가 멀리까지 다 들리도록 눈물 콧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있었다. 쌤통이다! 할뻔 했는데… 너무 서럽게 우니 측은하기도 했다. 근데 그때 갑자기 그 옆에 누군가 서서 어깨를 토닥이는 환상이 보였다. 뭐지? 분명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곁에 누가 서서 달래는 것처럼 보이지?
문득 기억난 말 하나에 작은 충격을 받았고 몸에 전율이 왔다. 예수님이 했던 말, ’나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한 그말이었다.
그랬구나. 전에 기도원에서 나의 곁을 지켰던 것처럼 오늘은 저 쌈닭 아주머니 곁에 계시는구나! 그래서 그때 내가 평안히 잠들수 있었던 것처럼 저 아주머니도 다시 회복하겠구나!
그 다음부터 나는 그 아주머니를 대하는 마음이 좀 달라졌다. 갑자기 좋아지기까지는 힘들었지만 더는 미워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보는 것만은 안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마치 약속한듯 집단으로 미워하자며 얼굴 찌푸리는 무언의 비난에서 한걸음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의 다른 표정도 보이기 시적했다. 이전에는 안보겠다고 외면하느라 못본 웃는 모습도 보였다. 더 큰 변화는 내 얼굴에서 찡그린 표정이 줄어든 것이다. 그 아주머니가 저만치 오기만 해도 피하며 찡그린 얼굴 표정이 되던 내가 달라지고 있었다.
세상의 재앙이 사라진다는 약속의 무지개는 지금도 뜨는 게 아닐까? 이 시대에는 그 무지개는 어쩌면 주님의 말씀과 위로로 달라지는 사람들의 얼굴표정이고 미소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도움의 살아있는 표시로 사람들에게 미소로 나타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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