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기도 6 - 자유, 내 안의 램프요정이 아닙니다
그저 기도 6 - 자유, 내 안의 램프요정이 아닙니다
누군가 옥상에서 던진 강아지가 하필이면 아래 길을 걸어가던 젊은 여자의 머리에 떨어졌습니다. 그 충격으로 여자는 목이 부러져 의식을 찾지못하고 중환자실에 있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뉴스를보면서 정말 끔찍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계획도 없었고 예상도 못한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는이런 상황을 비극이라하고 불운한 불행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당할 원인도 없는데 닥치는불행, 이런 종류의 고난과 불행은 하나님께 넘기고 쉼을 얻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자기 책임으로 생기는 고난도 맡아주시고 쉼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자발적 의지로 고난의 길을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음식을 나누어 배고픈 사람에게 대접하고 돕는 작은 일부터 평생을 바쳐서 열악한 나라의 선교사로 살기를 작정하는 큰 일까지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또는 억울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불의에 대항하다 갇히고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 길과 하나님의 길을 구분하는 기준이 뭘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를 불러 나에게 넘기고 쉬라는 말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의 다른 기준, 구분 하는 것 또한 오랜 숙제였습니다.
이 두가지 길의 다른 점은 누구를 중심으로 사는가에 달린 것 같습니다. 종종 내 모습에 부끄러워지는 경우는 내 길의 무게를 못 견뎌 무기력한 나를 원망하며 혼자 좌절할 때입니다. 내 고난의 무게만 벗기 위해 기도를 할 때 입니다. 남의 고난과 불행의 무게를 좀 덜어주기 위해 기도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아주 드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그렇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놓고 기도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 또한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기도의 대상과 내용이 온통 나의 성공만을 위해서거나 내 짐을 덜기 위해 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괴롭습니다. 그건 나와 하나님의 만남이 순수하지 못하고 변질 된 것이며 더 나가 하나님을 나의 램프요정으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좌절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경우의 대부분이 내가 무엇을 시도하다가 막힐 때입니다. 내 능력의 한계와 예상을 빗나간 결과를 만날 때 그런 절망에 빠집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무엇이든 앞서서 하신다고 믿으면 그런 좌절에 빠질까요? 내 안의 하나님이 정말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고 단정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안의 하나님은 무엇이나 가능하지만 내 안에 하나님이 안계시거나 혹은 그 하나님께 의논하거나 맡기지 않고 내 힘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기껏 믿는 것은 내가 원하는대로 행운을 가져오거나 보따리채 나에게 주시겠지 하고 바랄 때 뿐입니다.
부디 하나님과 나의 만남이 서로 진정한 기쁨을 주고 자유를 가져오는 관계로 유지되기를 기도합니다. 어쩌면 거의 나에게 달린 내 문제일수도 있지만… 비난하지 않고 긍휼이 여겨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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