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나라고 왜 안미울까만..
‘용서, 나라고 왜 안미울까만…’
아주 오래전 일이다. 초등학교를 채 졸업도 하기 전이었다
일찍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든 형이 명절에 집에 왔다
그런데 형이 새로 산 구두를 신고 온 것이 문제였다.
반짝이는 구두가 신기하기도하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다.
아무 생각없이 신고 나갔는데… 그만 공차기, 축구를 하고 말았다.
집에서는 형이 신발을 찾다가 아버지가 알고 말았다.
‘
“이놈의 자식아! 니가 생각이 있나 없나?
구두를 신고 공을 차면 어쩌냐?”
정말 아무 생각없이 공차기를 하고 와서 혼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두 옆구리가 흙이 묻고 앞도 살짝 까져있는 참사가 벌어졌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나가! 멍청한 놈!”
정말 많이 화가 나신 아버지는 나를 집에서 쫓아 냈다.
나는 밤이 늦도록 집 가까운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울다가 잠들었다
엄마가 살금 나를 찾으로 나와 소리없이 방으로 들어가 잤다.
난 운좋게 들키지 않았고 다음 날 새벽같이 학교로 날랐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모를리 없었다
아들을 내쫓고 편히 잠들 정도로 무심하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모르는척 해주시고 엄마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신 거 같다.
아버지의 용서는 그 정도 수준이고 다만 시간을 필요로 했던거 같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었다.
이번에는 나의 둘째아들이 서너살 일 때다
당시 최초로 나온 가정용 무선 전화기를 처음 본 아들 놈
친구네 아파트에 손님으로 가서 모두 밥먹고 차 마시고 노는 사이
새 물건에 유난히 관심많던 둘째는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 무선전화기를 몰래 가지고 화장실로 가서
불들어오는 버튼을 누르며 놀다가 그만 변기속에 빠트리고 말았다.
너무 미안했던 나는 바로 근처의 백화점에 가서
같은 모델 무선전화기를 사와서 교체해주었다.
친구네는 한사코 괜찮다고 하는데도.
당시 월급의 3분의1정도 나가던 그 무선전화기는
그렇게 비쌌고 거금이 들어가서야 사고는 수습이 되었다
빠졌던 무선전화기는 집으로 가지고 와서 말리고 했더니
다행히 작동되어 그 덕분에 가난한 집에 무선전화기를 쓰는 복을 누렸다.
그때 나와 아내는 사고를 친 둘째아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이전에 내가 저지른 사고와 혹독하게 용서받은 기억이
나도 모르게 나를 너그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호기심이고 실수였는데… 어쩌냐?’ 그러면서.
종종 용서는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용서하는 사람은 무지 힘들고 반대로 받는 사람이 무지 가벼운 경우가.
‘뭘 그걸 가지고!’ 그러기도 하고 치사하고 쫌스럽다고도 한다
세상은 이상하게 용서하는 사람이 더 힘든 경우가 더 많아진다.
영화 밀양에서는 유괴범에게 자식을 잃은 엄마가 용서를 하기 전에
미리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환하게 웃음짓는 유괴범을 보고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전도연의 절규가 나온다
‘나는 용서를 할 기회도 없어… 내가 용서도 하기 전에
벌써 용서받은 사람을 어떻게 또 용서를 해?’
하나님과 유괴범 둘만의 합의(?)로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버려
모진 고통의 시간을 통해 마음을 추스리고 용서를 해주러
교도소 면회를 간 자식잃은 엄마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런 종교와 이런 용서와 이런 순서는 모두 정당한걸까?
죽을만큼 고통을 겪고 이겨낸 아이엄마는 용서해줄 기회도 없어지는
이런 용서의 절차는 합당한걸까? 영화는 많은 생각을 남긴다.
예수님이 여러 종교지도자들과 우매한 군중에게 몰려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할 때, 하나님은 죽을만큼 괴로웠다.
들리는 소문에는 그때 하나님은 수천 수만개의 유황불과 번개와
온갖 지옥 돌 파편들을 영화속 수백만 군사처럼 준비하셨다고 한다
손 한번만 내리는 신호면 그것들이 온통 땅으로 쏟아져내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자들을 불바다 지옥에 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끝끝내 하나님은 그렇게 못하고 피눈물을 참으며 멈추고
대신 무지개로 한 약속을 지키려고 그들에게 용서를 베푸셨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자식잃은 아비의 가슴은 괴롭다는 말이다.
아마도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 나오는 아내의 심정이었거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매우 구체적이며 애닳은 사연을 담고 있다.
철사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북한으로 끌려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의 고통을 노래했다.
그 괴로움을 참다가 창자가 끊어지는 것을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 했다.
남편이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서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심정을.
아마도 갈보리 고개를 십자가 지고 오르며 죽어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그 백배 천배는 되었으리라. 단장의 괴로움으로…
그랬던 하나님이니 우리가 저지르는 숱한 실수나 잘못은 거기 비하면
용서하기가 새발의 피일지도 모른다.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도 비슷한 심정이었을거다
말리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기어이 받아낸 유산으로 멀리가서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망가진 채 돌아오는 아들이 왜 안미울까?
단지 그보다 더 큰, 둘째아들을 향한 사랑때문에 용서가 되고 기뻐할 뿐이다
나도 둘째아들의 큰 실수를 혼내거나 주워담지 못할 상처가 될 말을
그때 하지않은 것이 지금와서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이는 어려서 혹시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야단치고 용서 안한 그 순간을
나중에 두고두고 괴롭고 쪽팔리고 자책했을지도 모르니까!
용서란 그렇게 상대와 나를 동시에 구제하고 자유롭게 하고 오랜 평안을 가져온다
마음먹으면 세상에 못할 용서가 없고, 밉자고 하면 며느리 뒤꿈치가
계란같다고도 미워한다고 하더라.
용서하고 용서받고… 그 경험은 우리 모두를 서로 거리가 먼
무심한 남으로 만들지 않는 정말 좋은 나눔이다.
아내가 희귀난치병이 걸리고 대소변을 혼자 해결 못하는 상황에 빠져
십수년째 나를 필요로 하고,
나는 아내를 돌봐야하는 바람에 내 인생은 문닫아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맘에 걸려 아내가 늘 ‘미안해요 고마워요’를 입에 달고 산다.
나라고 수백번 수천번 아내몰래 밉고 고단하고 속상하지 않았을까?
왜? 내 인생은 끝장나고, 왜 나는 이렇게 고단하게 살아야 하는데?
자문하며 답없는 생활을 계속 이어 가면서 한가지 알게 되었다.
그보다 백배 천배는 큰 잘못과 죄를 탕감받으며 용서로 살아가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과 욕망의 범죄를 용서받으면서도
아내는 자기잘못도 아닌데 용서 못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우리는 그렇게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가족이 되고 점점 가까워진다.
아주 멀고 무심한 사이에서 생기는 쓸쓸함에서 벗어나고
차가운 남들로만 살아가는 비참한 세상에서 살지 않는 복을 얻는다
하여, 가끔 혼나고 벌이 따라오더라도 더 자주 받는 용서가 있어 참을 만 하다
자녀의 잘못에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고 나와 니가 무슨 상관이냐?는
하나님의 따끔한 말에도 불구하고 용서한다는 고마운 말을 더 자주 듣는다.
정말 감사하지! 멋있지! 천만다행이지!
우리가 서로 용서를 주고 받는 부모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이로 산다는 건 그렇게 귀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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