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2021. 11. 1. 12:48

‘조용한 희망’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거리에서 횡단보도 신호등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드디어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고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서려는 순간… 차 한대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횡단보도 앞에서 급정거를 했습니다. 무리하게 앞차를 따라 우회전을 하려던 차 한대가 횡단보도로 내려서는 사람들을 보고 뒤늦게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겁니다. 다행히 나는 차들을 살펴 보며 건너던 참이라 달려오는 차를 보며 불안해서 멈추고 기다렸습니다. 잠시 항의의 표시처럼 그 차를 노려봐 주었지만 욕은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속 상상에서는 들고 있던 물건을 차를 향해 집어 던지며 “사람이 죽을 뻔 했잖아요! 운전을 그따위로 합니까!” 라고 했지만요! 

 

그런데… 그렇게 건너오고 나서부터 이어지는 상상은 정말 싫고 끔찍했습니다. 단 2-3초의 차이로 불행한 사고는 생기지 않았지만 만약 그 차가 조금만 늦게 브레이크를 밟거나 내가 성급하게 건너려고 걸었더라면… 분명 큰 사고로 이어졌을겁니다. 이어진 내 무거운 고민은 내가 다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습니다. ‘만약… 사고가 났다면 집에 혼자 있는 아내를 어쩌지? 내가 병원으로 실려가고 빨리 가지 못하면?’ 여기까지 상상이 되자 처참한 슬픔이 확 몰려옵니다. 내가 돌아오기만 마냥 기다리는 아내는 비상이 걸립니다. 만약 연락조차 해줄 수 없다면 문제는 더 커집니다. 바로 소변 때문입니다 ㅠ 아내는 거의 3시간마다 소변을 빼줘야하는데 그 시간이 넘어가면 방광이 터질것처럼 불러오고 신경마비로 못나오는 소변은 과반사현상을 불러 환자는 땀을 흘리며 얼굴이 하얗게 되어 숨을 못 쉬게 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마냥 마냥 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다가 아내는 분명 119를 부를 기회를 놓치고 정신을 잃을겁니다. 아이들이나 형제들에게 연락을 해도 오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생사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소변을 빼야하는 특수한 의료 상황에 누구도 바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이 딱한 경우가 어처구니 없습니다. 장애가 심한 분들이나 나이 많은 노인들이 혼자 있다가 쓰러져 아무 도움을 못받고 때로는 그대로 사망하는 경우가 대개 그렇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간호사나 의사가 조치를 해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어 그런 걱정은 한번도 안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나 혼자만 아내를 지키다보니 이제는 내게 생기는 어떤 사고나 질병도 심각한 2차 불행을 불러오게 생겼습니다. 그 현실이 실감나자 갑자기 식은 땀이 나고 숨이 답답해집니다. 사람이 바깥을 다니다보면 별 일이 다 생깁니다. 정작 사고난 나는 어떻게든 해결하지만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는 아내는 내 부재가 아내의 생사를 좌우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경우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니…

 

차라리 말기 암이거나 다른 질병이라면 며칠을 혼자 있어도 살아는 있을 겁니다. 굶어도 대소변을 침대에 보더라도… 그러나 아내는 상황이 다릅니다. 숨도 못쉬고 질식하고, 소변이 신장으로 역류하면 폐사가 올테니 단 반나절도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 생각이 미치니 슬픔이 몰려옵니다.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 난다는 조바심때문에… 몇년 전에도 나의 심각한 건강악화로 이런 벽에 부딪혀 공황장애에 시달렸습니다. 그때도 간신히 회복되었는데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오고나니 또 다른 상황이 나를 압박합니다.

 

얼마 전 ‘조용한 희망’이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겨우 스물너댓의 나이에 세살짜리 딸을 데리고 지독히 열악한 주변 환경을 이기며 생활의 전선을 헤쳐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알콜중독에 걸리고만 아이 아빠인 남자에게서 도망치면서 온갖 고난이 닥칩니다. 굶고 고된 일을 하며 아이를 여기 저기 맡기고 오래된 고물차 하나를 의지하며 노숙도하고… 

(이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하였고 우리나라에도 출판된 ‘조용한 희망’을 원작으로 합니다. 또 딸 알렉스 역할을 맡은 마가렛 퀄리와 엄마 폴리역을 맡은 앤디 맥도웰은 실재로 모녀지간입니다)

 

 

 

 

나도 이전 아내가 아프던 초창기에 낡은 차로 일터와 장거리 강원도를 오가며 지낸 적이 있습니다. 트렁크에 갈아 입을 옷을 넣고 다니며 험한 일과 간병을 잠도 못자며 병행하던 그 시절이 자꾸 기억나 눈물 적시며 보았습니다. 딸 하나를 살리고 울리지 않겠다고 온갖 험한 일과 어려움을 참아내는 드라마속 어린 엄마의 그 심정이 영락없이 그때의 나와 닮아서 더 그랬습니다. 작은 파도들이 끝도 없이 몰려오며 이제 좀 나아지려나 싶으면 또 발목을 잡고 산산조각내버리는 가난한 현실의 운명이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끝없는 선택과 다시 일어나 움직여야 하면서도 자존심과 딸아이의 행복을 찾아주려는 어린 엄마의 하루하루가 드라마속에서 진짜 우리 세상과 다름없이 질기게 이어졌습니다

 

삶은, 특히 가난과 열악한 처지에 몰린 이들의 생활은 그리 쉽게 동화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드라마든 진짜 삶이든 비슷합니다. 늘 순간마다 괴로운 선택을 요구하며 선택의 결과로 따라오는 무거운 현실을 감당하게 합니다. 두 가지가 다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돈도 벌고 자존심도 챙기거나, 일도 잘 풀리면서 가족사이에 갈등도 안생기거나 혹은 배우자나 부모가 개과천선 하면서도 다른 부작용도 없다거나…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하나만 주거나 턱없이 모자라거나, 호사다마 부작용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착하게 살려고해도 사고가 나고, 고생이 끝나고 이제 살만해도 불행한 질병에 걸리고 갈등이 깊어지거나 그럽니다 이 드라마도 더도 덜도 아닌 사람사는 세상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너무도 익숙하고 많이 보는 인간사 그대로…

 

그래서 그런 질곡속에서 끝없이 애쓰고 다시 일어서며 한 번 만 더 사랑의 시도를 해보는 어린 엄마에게 박수를 보내고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그렇게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와 모델은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요란하게 갑자기 된 벼락부자나 기적들의 사례가 아니라 변치 않는 고된 세상에서 변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행운의 보따리가 하늘에서 뚝떨어지는 삶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하루하루 쌓아가는 결과로 오는 단단한 결과 말입니다. 

 

원하기는 내 신앙도 로또를 만나는 길이 아니라 그런 길이기를 빕니다. 로또만 기도해야하는 신앙은 너무 소수만 누리고 나머지를 들러리로 만드는 아픈 허무함이고, 그렇지 못하면서도 사는 사람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부디 엄청난 희망이나 기적이 황당하게 연달아 생기지 않아도 눈물닦고 다시 일어나는 ‘조용한 희망’이 우리에게 늘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아내에게도 별안간 달라질 가능성이 없어도 ‘조용한 희망’ 속에 세살짜리 딸 메디를 안고 손잡고 산을 오르는 어린 엄마처럼 착한 심성과 의지가 늘 함께 해주기를 빌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