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밤 12시에 혼자 가는 노래방

희망으로 2021. 7. 27. 09:43

 

<밤 12시에 혼자 가는 노래방>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무거워진다. 

딱히 이유를 대라면 무슨 감동적인 반전이라고 할만한

그런 멋진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연 하나 없는데도 그렇다는 게 비극이다 ㅠㅠ

 

이런 저런, 이것 저것. 일상에서 누적되는 잔 스트레스들이

마치 눈이 가지에 쌓이듯,

올때는 나비보다 가볍게 내리더니

마침내는 바위보다 무거워져 나무를 작살내는 불행처럼

그렇게 갑갑하고 우울해졌다.

 

혼자 노래방을 갔다.

아내의 소변호출을 밤 12시에 처리하고

‘앞으로 최소한 1시간에서 2시간 사이는 안찾겠지?’ 하며...

이상한듯 바라보는 카운터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혼자 가사가 와닿는 노래를 부르다 멍때리다 반복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생각났다.

 

아내가 심하게 나쁜 상태일때 용인 어느 병원에 머물렀다.

큰 종합병원에서 퇴출당해 갈 곳이 마땅치않았는데

희귀난치병 환우회에서 알아봐주고 예약해준 병원.

그런데 그 입원실 침대 바로 옆자리에

서른 중반의 막내딸을 돌보는 칠순의 아버지가 계셨다.

왜 엄마도 아니고 아버지가 다 큰 딸의 병간호를 하나 궁금했다. 

 

그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반쯤 식물인간이 된 막내딸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씻기고 먹이고(그것도 목에 튜브를 단 상태로) 재활치료실로 오가고.

제대로 여미지 못한 커튼 사이로 기저귀를 가느라 뒤집는 중에

딸의 가려야 할 맨살들이 보여 민망하기도 했다.

한편 힘에 부치는 덩치의 딸을 감당하느라 애쓰는 모습이 딱했다.

 

그런데 괴로웠다.

하루 종일 핸드폰에서 찬송가며 복음송을 틀어서

딸아이의 귀에 대주는 바람에 고문아닌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핸드폰의 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높고 부드럽지 못한 음질을 계속 듣는다는게.

정작 크리스찬인 아내와 나인데도 그 긴 소음은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추석명절 당일 날 아침에 비상이 걸렸다.

다급하게 오고가는 간호사들과 놀란 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절이라고 안쓰러웠던지 그 아버지는 딸의 입에 채 넘어가기도 전에

계속 먹인 밥이 목에 걸려 숨을 못쉬었다.

아무 조치도 못하면 곧 죽게 생겼다. 

 

옆 침대에 있다는 이유로 졸지에 불려간 나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 큰 처자임에도 불구하고 민망함을 감수하고 등뒤에 앉아

손을 깍지끼고 젓가슴을 위로 쓸어올리고 토해내게 했다.

명절아침이라 힘쓰는 남자가 아직 없는 시간이라며

간호사들이 도와달라고 숨넘어가며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 딸은 그렇게 여러 명이 붙어 소동을 벌인 후 죽다가 살았다.

 

그 일 이후에 그 아버지는 많이 늙어버렸다.

잘난 형제 자매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서 떵떵거리고 사느라 오지못하고

엄마마저 회복 가능없다는 병원의 판단에 이혼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 비슷하게 연락을 끊고 외면하고 있었다.

 

그 신앙심 투철한 아버지가 밤만되면 나갔다 들어왔다.

병원밥도 딸이 먹을 경관식 음료로 나오니 보호자는 밥을 먹을 수 없고,

그래서 나가서 병원 근처 순대국밥을 단골집으로 만드셨다.

어느 날은 밥먹으며 반주를 곁들여 한잔하고 오시고 하더니

한숨을 쉬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그런 날이 점점 늘었다.

 

“우리 같이 죽자 딸아... 내가 더 이상은 못견디겠다.”

 

이후에도 씻기고 옮기고 간병하다 몸이 못따라가고 좀 힘들면

딸에게 그렇게 중얼거리셨다.

그러면서 밤마다 한 잔 약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잔다고 하셨다.

‘저러다 건강이 나빠져 병이라도 나면 저 딸은 어쩌라고...’

그때는 그 아저씨의 핑계가 야속하기도 하고 진짜 변명같이 느껴졌다.

‘나약한 믿음...’ 속으로 그러면서.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모습에서 그 비슷한 분위기와 행동을 보게 된다.

쌓인 피로는 이제 교과서적인 신앙인의 자리를 지키기 힘들어진다.

미치거나 도망가지 않으려면 어떤 방법이던지

그날의 피로를 그날에 풀어야 했다.

안그러면 길게 갈 수가 없다는 불안이 몰려왔다.

 

그제야 사도바울의 고백이 와닿았다.

사랑하는 교우들이 모두 지옥에 간다면 자기 혼자 천국을 못가며

그들을 천국에 보낼 수 있다면 자기는 지옥도 갈 수 있다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노래방에서 한시간을 소리소리 지르고 왔다.

새벽1시. 살그머니 돌아온 병실의 아내는 깊이 잠들어있다.

아마 한 시간 안에 또 나를 깨우며 부를 것이다.

 

“나 소변...”

“응, 알았어”

 

뭐가 해답인지 모르겠다.

아내를 길게 못 돌보더라도,

하루만 돌보고 가더라도 교과서대로 살아야할지,

아니면 오랜 시간을 내 짐은 내가 해결하며 곁에 머물러야 할지...

 

* 이 글은 코로나 전염병이 오기 전인 2018년 봄 어느 날 밤 일기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쓴 한 달 후인가? 

5년만에 다시 우울증이 심한 재발로 와서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고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저 당시가 부러운 상황입니다.

나가고 들어오고 출입의 자유도 통제된 채 2년째 살다보니 ㅠ 

어느 시절이나 힘들지만 나중에 다시 보면 알게 됩니다

틀림없이 보이던 평가나 마음도 변한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미래의 어떤 날 오늘 여기를 보면 또 그러겠지요?



2021.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