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부시럭...’
캄캄한 한 밤중, 나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잠을 깨고
얼른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살며시 덮어 잡는다.
거의 서너시간 간격으로 아내는 소변을 빼야 한다.
화장실을 가는 것이 아닌 고무 튜브를 사용한 방법으로...
그러니 밤 12시에서 새벽 4시 사이에 한번은 꼭 걸린다.
다들 깊이 잠든 다인실 병실에서 아내는 나를 부르기가 쉽지 않다.
간혹은 너무 고단해서 깊이 잠든 나를 깨우지 못해, 어떤 때는 안 깨우려
너무 힘들게 버티고 참기도 한다. 과반사로 창백해지고 숨도 거칠어지면서도.
그래서... 고민 끝에 당기면 길어지는 6단 안테나 봉을 샀다.
그걸로 보조침대에 잠든 나를 툭툭 쳐서 깨우는 도구로 쓰려고.
아내의 배변 소변 신경이 마비되어 그렇게 산 지 벌써 12년째.
나는 자면서도 늘 신경을 곤두세운다.
처음 전신마비가 왔을 때는 두 시간 간격으로 몸을 돌려주느라 그랬고
이후에도 땀이나 한기로 오락가락해서 그걸 해결해주느라 그랬다.
때로는 밤중에 아내가 아파서 일어나야했고 어느 날은 깔린 팔다리를
제자리에 놓아주느라 자다가 깨기도 했다. 이제는 주로 소변때문이지만.
그러다보니 습관이 되었다. 자면서도 늘 귀기울여 일어나는 것이.
거의 열번이면 일곱 여덟은 아내가 안테나봉을 잡느라 더듬는 소리에도
내가 깨어 아내의 손을 살며시 덮으면서 깼다는 걸 알려준다.
열에 두세번은 깊이 잠이 들어 아내가 그걸 펴서 어깨나 머리를 툭툭 쳐 깨우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를 다닌지 3년쯤 되었을 때
청년부에서 부활절에 스데반집사의 삶을 성극으로 공연했다.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신앙이 뜨거워지고 무엇이든 감격하던 시기였다.
사도 바울을 많이 존경하고 닮고 싶었는데 성경을 읽다가 놀랐다.
그 존경하는 사도 바울이 스데반집사가 돌로 맞아 죽는 장소에서
옷이나 갈무리하고 앉아 어서 죽이라며 구경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본 것이다.
아직 깊이도 없고 성경의 지식도 짧기만 하던 초기에
따로 국밥처럼 따로 존경하던 사도 바울과 스데반집사, 이 두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한 사람은 예수를 전하느라 목숨도 내놓고 한 사람은 그런 이들을 잡으러 다니고
미처 그 연관을 모르든 내게 그 장면은 정말 마음 아프고 충격이었다.
특히 스데반집사가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많은 선지자와 믿음의 선배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배신과 미움의 사람들을 지목했다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며 잘못되어가는 유대인과 힘 가진 종교인들을 나무랐다.
기어이 돌을 맞아 죽으면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보는 순간은 전율이 왔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_ 사도행전 7:59~60]
아무 경력도 지식도 없는 내가 연출을 하고 청년들을 부추겨 이 성극을 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가요가 있지만 그 몇배로 나는 스데반을 생각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복일까? 가슴 뛰며 빌고 빌었다.
“~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고...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죽음을 잠에 드는 것으로 성경은 기록했다.
공포와 두려움, 모든 생명의 끝이라 여겼던 죽음이 잠이라니!
깨어나면 하늘나라와 영원히 다시는 슬픔도 고통도 없는 천국이라니!
그 꿈과 기대는 내 인생의 해결책이고 위로고 희망으로 보였다.
결혼 후 몇 가정과 독신 몇이 더 추가된 신앙모임을 계속하면서
각자 이름이나 직급대신에 평등한 친밀감을 가져올 별칭을 지어 부르기로 했다.
나는 ‘늘깨’라고 생각끝에 정했다.
성경에 등불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신부들이야기에 늘 깨어서 준비하라 했고
늘 깨어서 기도하라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스데반집사처럼 늘 깨어 살고 싶었다.
다른 목표, 다른 욕심으로 휘둘려 낭비하거나 잘못 살지 않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어느 날은 찬송가를 부르다 다들 배를 잡고 웃었던 날도 있었다.
285장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가사에 이런 부분이 있다.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그 뒤로 공동체 식구들은 띄워쓰기를 애매하게 하면서 나를 놀리곤 했다.
‘늘깨! 어서 기도해~’ 그러며 기도를 시키기도 했다.
* 최일도 목사님 옆 맨 끝에 앉은 막내딸, 다녀온 뒤 다일영성수련회도 참석하겠다고 해서 나를 감동시켰다.
좀 힘들 수 있는 과정이었는데도.
맑고 단순하게 한가지 바람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그 시절,
스데반집사의 삶과 죽음이 나를 흔들고 설레이게 하던 초기 신자의 기쁜 순간들.
아... 이제는 숱한 세파와 불행과 슬픔, 좌절들에 쓸려다니는 동안 온통 멍들었다.
스무살 막 넘었던 그 때의 바람, 결혼 초기에 꿈꾸며 각오하던 ‘늘깨’로 살고 싶던
그 간절한 소망들도 무너지고 힘들게 버티는 생존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 교류가 있었던 청량리 무료급식의 다일교회 최일도목사님은
막내딸이 함께 아프리카 우간다 무료급식센터 준비를 위한 선교일정을 다녀온 뒤
내게 이런 인사를 남겼다.
"늘깨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응원합니다 온 맘다해~~!!"
초기 아내가 사경을 헤맬 때 아무 방법이 없어 다일무료천사병원에서 임종할 수 있을지 물었다.
상태는 너무 안좋은데다 돈도 다 떨어지고 집도 없어졌다. 갈 곳이 없었다. 심신은 지치고...
그래서 이제 치료를 포기하고 아내를 떠나 보내고 싶었다. 그 뒤 나도 정리를 할까 싶었다.
그 편지를 보낸 시기 최일도목사님은 마침 외국을 나가 한참만에 돌아온 뒤 앰블런스 차를 보내려고 했다.
(그 때는 아직 갈말과 최간사님을 만나기 전이었다. 지금이라면... 갈말로 갈것같다)
아내를 데려가서 무료천사병원에서 돌봐주겠다고 당시 다일병원 원장님이 직접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나 몇달이 지났을 때 다행히 고비를 넘긴 뒤라 고맙지만 사양했다. 다른 분이 받아야할 자리라.
그런 일 있고 난 뒤라 ‘늘깨’라는 호칭을 다시 듣는 내 심정은 많이 아프고 여러 감정들이 몰려왔다.
‘나는 어쩌다 늘깨어서 기도는 못하고 늘깨어서 아내를 돌보고 잠을 설치는 이런 삶의 길에 놓였을까...,
바울과 스데반집사를 연출하신 하나님이 나를 출연시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어떤 것일까? ㅠ’
*돌 맞는 스데반과 상단의 의자에 앉아 옷을 지키는 바울. 렘브란트 작품
202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