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기쁨과 짜증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기쁨과 짜증>
“국어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야, 국산 맥주는 제 원료가 안 들어가서 오히려 수입맥주보다 비싼 셈이라고, 근데 내가 무심코 ‘맞아요!’ 그랬어“
“응, 그랬구나,”
그런데 대꾸를 하고나니 좀 이상했다.
“가만, 뭐지 이거?...,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흐흐 국어 선생님도 좀 지나서 휙 돌아서서 ‘누구야! 대답한 사람?’ 그러더라!”
“분명 문제 있는데, 그냥 넘길 일이 아니야! 그 말은 국산맥주와 수입맥주 두 가지를 다 맛보지 않으면 비교할 수 없는 대답인데... 1번 경험, 2번 버릇, 3번 습관, 4번 중독! 어느 거야? 솔직히 말해!“
“아, 아냐! 절대, 네버! 믿어줘! 인터넷에서 보았단 말야! 씨....”
그런데 이 이야기를 아이 학교에서 태워오면서 나눈 지 딱 이틀만인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병실에서 아내 약을 챙겨 먹이면서 ‘내가 당신에게 뭐야? 1번 머슴 2번 남편 3번...’ 하다가 문득 내가 이런 비슷한 이야기 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도무지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뭐였지? 당신에게 이런 비슷한 거 한 번 했는데?”
“모르겠는데...”
기억하고 보니 딸에게 한 말이었다. 요즘 내가 늘 이런 지경이다. 머릿속이 바둑판이다. 깜깜하든지 새하얗든지 둘 중 하나다. 뭐 어차피 어느 쪽이거나 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하루만 지나면 무슨 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나이들어가면서 생기는 여러 서러운 증상중의 한 가지일거다. 몸도 여기저기 삐거덕거리고 고장 나는 데 정신 기능인들 안 그럴까. 그런데 이렇게 나이 먹어 서러운데 한 술 더 보태는 아이들.
아들은 안하던 육체노동 아르바이트하느라 아침 일찍 가고 밤늦게 녹초 되어 돌아온다고 쌓아놓고, 딸은 손가락 하나를 알미늄 기브스 해서 열흘째 물에 손 못 댄다고 냅두고... 딸이 씽크대 수북한 그릇들을 정리해달라고 S.O.S를 보내왔다. 아침 일찍 아이들 자취방으로 가서 설거지 해주다 힘들어 투덜거렸다.
‘이게 뭐야? 이 꼴이 뭐야! 내가 지네들 머슴인가? 어이구... 마누라 아파서 간병하는 건 내 운명이다 내 책임이다 치고, 이제 아이들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나? 에이....‘
그런데 아마도 아이는 많이 고마워하고 이런 아빠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할거다. 내가 어떻게 투덜거리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그러고 보니 무슨 마음으로 어디를 보느냐, 누가 중심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병이 나으시면 뭐가 가장 하고 싶으세요?”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 지어 한 번 먹이고 싶어요.”
아내는 몇 번인가 신문 방송 인터뷰에서 병이 나으면 애들 따뜻한 밥 한 번 직접 해먹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런 것도 소원이 되나? 반대로 나는 충분히 그렇게 해줄 건강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안 한다. 전에는 방 한 칸도 없어서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아이들 자취방도 있어서 환경도 된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아내에게는 꿈같은 소원이, 할 수 있는 내게는 귀찮은 일거리처럼 느껴진다. 왜 그럴까? 아마도 아내에게는 밥 먹는 아이들 얼굴과 기뻐하는 모습만 떠올리고, 나는 쌀 씻고 차리고 치울 일감으로만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는 소원이 누구에게는 일거리가 되다니. 마음 하나 다름으로 생기는 천지차이 기쁨과 짜증이다. 세상에는 이런 식이 수두룩하다.
** 아이가 고3 수능생일 때 손을 다쳐 수술받기 직전에 쓴 글이다. 막상 입원하고 수술받고 누운 걸 보니 그놈의 설거지 그냥 편하게 해줄걸...후회가 밀려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