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무두쟁이 집으로...
<베드로! 무두쟁이 집으로...>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 땅의 법이었고, 누구나 지키는 관습이었다.
그러나 딱 한가지 경우만 예외로 인정이 되었다.
그것은 여자가 모르고 결혼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남자가
'무두쟁이' 가죽 수공업자인 경우다.
그 경우만 여자의 이혼요구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인정이 되었다.
'당연하지!' '그럼, 이혼해야지 그렇구 말구!' 이런 분위기였다.
이스라엘에서 죽은 것들을 만지는 것은 부정을 타는 것 중에서도
아주 심한 부정이었다. 하물며 죽은 동물에서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말리고 다듬고 만지는 가죽세공업자인 '무두쟁이'는 더더욱...
그가 만진 물건도 부정을 탄다고 안 만지고 그가 누운 곳에는 눕지도 않고,
그와 밥을 먹거나 그가 마신 물그릇으로 물을 먹는 따위는 금기였다.
온 율법이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는데 종일토록,
일생을 부정한 죽은 동물의 가죽을 만지며 사는 사람이니...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 '무두쟁이'와 몇날 며칠을 한집에서 먹고 자고 산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독히 외면하고 경멸해야하는,
그래야만 하는 철저한 정통 유대인이 그랬다.
그가 바로 베드로였다.
욥바에서 병으로 죽은 도르가(다비다)를 살리고 난 후,
묵고 가라며 붙잡는 도르가의 집도 마다하고,
자기들도 기적과 은혜가 필요하다며 기다리는 이들의 초청을 물리치고,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무두쟁이' 가죽수선공의 집에서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천대를 받았던 신분의 '백정'이 있었다.
백정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농공상'이라는 계급 목록에도 못들어가는
인도의 불가촉천민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나이가 많던 늙었던 상관없이 백정에게는 아이들도 반말을 했다.
짐승을 부르는 호칭이나 말처럼...
그런데 공통점은 그들이 하는 일이 그 사회에서 없어도 되거나,
정말로 있어서는 안되는 직업이었나 하면 전혀 아니었다.
이스라엘에서 가죽으로 만든 제품들은 필수적이었고,
아주 고급 가죽제품은 신분의 상징이며자랑거리이기도 한 대상이었다.
가죽 신발, 가죽 가방, 가죽 악세사리 등.
우리나라에서도 소고기나 소고기 국은 일등 식품이었다.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모두가 기다리는 고급식품이었고
심지어 뇌물로도 사용할 정도로 선호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게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오랜 세월 가능했을까?
가장 멸시하고 비웃으면서 이들의 작업결과물은 아주 선호하는 것
또 그 신분을 짐승 수준에 가깝게 냉대와 모멸을 할 수 있었는지...
베드로는 그렇게 한 인간의 내면에 담겨진 이중 양심,
이율배반 모순투성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두쟁이 집에 머물렀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는 하늘의 평화를 전하거나
죄인을 구하려 죽기까지한 예수를 전달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세리와 창녀, 도둑들까지도 어울리며 식사하는 것을
살아 생전 따라다니며 보고 살았던 베드로니 더 그랬을 게다.
욥바 지역이 그 뒤로 '무두쟁이'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현대판 '무두쟁이'와 '백정' 비슷한 사람들이 아주 최근까지도 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아직도 그렇게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빌딩이나 대학, 병원 등의 청소를 담당하시는 분들,
새벽이면 남들 나오기전 길을 깨끗히 청소하시는 분들,
한 때는 남의 신발을 닦아주는 분들에게도 그런 시선으로 낮춰보았다.
엄마가 아이들 공부하라고 야단치면서 하는 말이
'니들도 공부 안하면 나중에 어른되어서 저렇게 된다!' 하는 식이었으니...
아직도 어떤 곳에서는 비정규직, 천하게 보인다는 직업분야의
종사자분들에 대한 푸대접 비하가 사회 구석마다 흔하다.
그 작은 월급마져도 줄이고 덜 주려고 계약을 바꾸고 잘라내고...
성경에도 이런 말이 있는걸보니옛날에도 별로 다르지 않았나 보다.
마태복음 23장 1-4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지금 이땅의 종교 지도자와 사회지도층은 많이 다를까?
굳이 다른 사람을 예를 들 필요가 있을까?
우리들의 이중성, '말씀은 말씀이고’ 하는 식의 생활습관을 보면.
차를 운전할 때 신호등을 곧이곧대로 지키려고 서있으면
때론 뒤에서 빵빵거리고 휙휙! 지나가며 사람을 무안하게 한다.
'흥, 잘난척하기는!'하며 꼭 비웃는 듯,
예배때는 양보와 사랑, 사람을 대하는 온갖 좋은 이야기들에 아멘! 하고도
생활로 돌아오면 만만치 않게 변신! 하면서 이중적 라이프스타일로 살기도 한다.
이 작은 행위가 반복되고 커지면서 바리새인도 나오고 서기관도 나오고,
무두쟁이를 벌레처럼 취급하는 유대인도 되고,
백정이라면 허연 수염을 가진 어른도 아이들도 반말로 불러대는 결과가 온다.
병원계단이나 화장실 옆 공간에 쪽리고 앉아 점심을 때우는 비정규직 어른들을
돈 더 벌겠다고 학교에서 내몰아내고, 억울하다 소리치는 사람들에게,
시끄러우니 학교 밖으로 나가서 하라고 밀어내는 젊은 지성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도 ‘무두쟁이' '백정'을 대하듯 하는 고약함이 아주 많다.
나도 어쩌다 병이 든 가족이 있다보니 갖가지 병든 사람들 속에 산다.
어쩌면 그보다 못한 처지로 추락하고도 서로 무시하고 낮춰본다.
온몸은 망가지고 다 털어먹고 가난한 무리들 속에 오래 살아가는 중이다.
우리의 이중인격, 이중신앙을 언행일치, 하나로 만들기 위해
복음을 복음으로, 서로 사랑으로 대하며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습관적인 경원, 무시를 조심해야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무두쟁이'와 몇 날을 먹고 마시고 함께 머무른 베드로에게 존경을 표한다!
* 이미지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편견을 고치라는 환상을 보는 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