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달팽이도 앞으로 간다

희망으로 2020. 6. 14. 11:00

 

 

<달팽이도 앞으로 간다>

 

하늘이 파랗습니다. 

이틀 째 비가 온다는 데 오늘은 아직 하얀 구름들이 떠 있고 

그 사이 사이로 아주 파랗지는 않지만 소라빛 하늘이 보입니다. 

참 좋은 날입니다. 하늘이 더운 날들 사이로 주는 선물입니다. 

 

아내를 코끼리 자전거라고 하는 운동기계에 태워 주고 옆에서 기다리며 

하늘을 보다가 문득 모르고 있던 한가지 변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손이 힘이 없어 코끼리자전거 손잡이를 잡고 돌리지 못해

늘 큰 손수건 한 장을 준비해 손을 코끼리손잡이에 묶었습니다. 

딸아이가 천연염색해준 예쁜 손수건, 그 색들이 다 빠져 버렸지만.

마냥 어제 같은 오늘이라고 지치기만 했지 어느날부터 손수건으로 

묶지 않는 데 그 변화를 나는 몰랐습니다. 

늘 회진 오는 선생님들이 ‘좀 어때요?’하고 물으면 녹음기 틀듯

‘조금 나아지네요. 달팽이가 걸어가는 속도처럼요‘ 라고 말했는데 

그 달팽이가 많이 옮긴 것을 오늘 갑자기 알았습니다. 

달팽이도 쉬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는구나! 당연한 법칙을 충격 받으면서.

 

옆 병실에 새로 오신 여자 환자분이 아내와 동갑입니다. 

혼자 병원생활을 해왔는데 상태가 나빠져 혼자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남편분이 생업을 접고 간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사지마비인 아내를 오래 돌보는 중임을 병원 복지사님께 듣고 

제게 간병의 애로점과 요령 등 도움말을 청해왔습니다. 

특히 전에도 힘들던 대변문제가 이제 거의 자발적으로 안 되어 어렵다면서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간병기술이나 요령, 필요한 약들이야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배우고 

병원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환자인 그 부인이 그지경이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우울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남편의 서투른 처치법이 싫어져 자꾸 다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항문에서 변을 빼내다가 다치기도 하다보니 자신감도 없어졌습니다.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그 과정이 힘들고 온갖 극단적인 생각들이 오갈 지

너무 생생히 그려집니다. 눈앞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할수 있는대로 위로를 해드리고 요령도 좀 전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나중에 그분의 아내가 무지무지 고마워했다고 전해서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자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참는게 얼마나 힘이 드는데...아무리 남편이라도,’ 

그 말을 듣고 미처 몰랐던 것을 한가지 알았습니다. 아내도 그랬었다는 사실을.

그동안 참 힘든데도 화내지 않고 잘 견뎌준 아내가 다시 보였습니다. 

짜증내고 자주 울기라도 했으면, 그만두라는 말 한번만 했더라면

제가 아는 제 성격상 때려 치우고 다른 길을 갔을게 너무 분명합니다. 

자전거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으며 

‘고마워!’라고 했습니다. 달팽이처럼 세월을 걸어가고 있는 아내, 

배로 자갈바닥을 끌고 가듯 온갖 힘든 상황을 소화하며 참아준 아내에게, 

아내는 뜬금없고 앞뒤도 모른채 고맙다는 내 말이 싱거웠을 겁니다.

 

그러고보니 예전 병원에 일년이 넘도록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같이 대 소변 문제를 끌어 안고 살아가고 있고, 

통증에 팔 다리가 오그라드는 강직으로 숨도 못쉬고 헉헉 거리기도 하면서 

그래도 자주 웃고 치료를 받으며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때론 장애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화제로 이야기하고 놀기도 했습니다. 

‘많이 아프고 불편한 몸으로도 자주 화내지 않고 살아주어서 참 고마워요! 

집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다가 당신도 생각이 나서요’ 

그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정말 1년반 가까이 사는 동안 그 사람들이 늘 화내고 늘 울면서 지내는 것을 

곁에서 보아야했다면 같이 투병하는 우리도 더 힘들었을 겁니다. 

 

‘하늘이 참 좋다!’ 고마운 하늘을 바라보며 이 마음으로 오늘 

내 곁에 머물러 살다가는 사람들에게 잘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 먹어봅니다. 

산다는 게 자갈길 진흙길 가시밭도 지나지만 하늘은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 

잠시만 방심하면 어느새 왼손에는 탐욕이 오른손에는 교만이 가득 찹니다. 

이러고 살 처지가 아닌데, 이럴 때가 아닌데 후회가 밀려오기도 합니다.

불안과 비관을 오늘 다시 내려놓습니다. 손 털고 씻고 다시 출발합니다. 

저 하늘에서 흐리고 비 오는 중에도 맑은 하늘을 잠깐 선물해주신 분께 

감사하며 달팽이 길 가는 속도일지라도 하늘로 걸어갑니다. 

어느 날에는 문득 저만치 가 있는 저를 보고 싶습니다. 믿습니다. 

전혀 예상도 기대도 못한 제게 아내가 보여준 결과를 기억하면서!

그리고 감사와 응원을 드립니다. 이 시간에도 세상 땅끝까지 곳곳에서

달팽이보다 더 어려운 처지지만 앞으로 걸어가고 계실 많은 분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