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날은 햇살도 좋았다
<그때 그 날은 햇살도 좋았다>
31년 전 오늘,
서울올림픽이 열린 그 해 9월3일.
나와 아내는 종로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가을하늘을 같이 느꼈다.
아내는 면사포를 쓰고 빨간벽돌 정원과 강당에서 사진도 찍고.
그렇게 결혼식을 치르고 31년을 같이 살았다.
온갖 곳을 같이 가고
온갖 일을 같이 겪고
웃을 때도 같이 울 때도 같이 동행했다.
아내의 곁에는 늘 내가 있었고
내 곁에는 아내가 늘 함께 있었다.
종일 비가 뿌리는 오늘을 병실에서 거의 다보내다가
아내를 데리고 미용실을 가서 머리도 자르고 염색을 하고 왔다.
꼭 일주일 후 막내딸아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간다.
아이 친구들에게 너무 누추해보이지 않으려고...
안그래도 휠체어에 소변주머니도 차고 가는데 늙어보이기까지 하면 그렇다.
미용실을 다녀오자마자 나를 기다리는 건 결혼기념일의 멋진 식사도 아니고
주고받는 선물을 풀어가며 지난 날을 감사하는 시간도 아니고
밀린 설거지와 아내의 치료시간에 필요한 준비를 해야하는 간병 잔일들이다.
하루가 이렇게 다 가는데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진다.
우리를 맺어준 신의 의도는 무엇일까?
몰래 숨겨놓은 이벤트같은 깜짝 사랑은 혹시 없는걸까?
그저 30년이 넘도록 서로를 섬기고 돌보다가 생을 마치고 돌아오라는
미션만 주어진걸까?
좀 야속하다... ㅠ
어떤 부부는 멋진 노후도 주시면서 우리에게는 왜?...
어서 오늘이 가고 아무 날도 아닌 내일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아무 날도 아닌 날에는 덜 서운하고 덜 외롭고 덜 야속하겠지?
결혼기념일 31주년의 저무는 오후 해도 없고 비만 후두둑 창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