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도 당시에는 상처고 아픔이다
<성장통도 당시에는 상처고 아픔이다>
둘째아들이 충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먼 포항까지 가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농구를 하곤 했다. 객지의 외로움과 빡센 공부의 고단함을 털어내느라 더 그랬던거 같다.
그러다 다쳤다. 좀 격렬하게 친구와 몸끼리 부딪혀서 병원으로 실려갔고 뼈가 금이가고 인대도 다쳤다. 검사후 치료를 받고 기브스를 한 채 지내야했다. 걱정스러운 것은 의사가 한 말 때문이었다. 시티로 판독한 결과 어쩌면 성장판이 상해서 다친 곳은 나아도 성장이 멈출수도 있다고 했다. 아직 십대의 후반이고 더 자라야하는데 걱정이 되었다.
둘째는 중학교 다닐때는 위의 형보다 머리 크기만큼 작았다. 나이는 23개월차이지만 빠른 2월생이라 학년은 바로 아래 였다. 종종 생각이 달라 다툼이 생길때면 딱 키 차이만큼 주눅이 들어서 할말을 다 못하고 씩씩거리며 참곤 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걸렸다. 키가 못자라면 그 열등감이 극복이 못될 수도 있다 싶어서...
그런데 그 후, 오랫동안 다쳤던 부위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자다가도 통증때문에 잠을 깨기도하고 낮에도 시큰거려 신경이 쓰인다며. 막내딸도 자주 그랬는데 그러면 같이 잠 못자고 주물러주곤 했다. 몇년이 지나고 나중에야 알았다. 그 통증은 다친 이유가 아니고 성장하면서 오는 성장통이었던 것을. 둘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그 몇년사이 20센치가 넘게 키가 자라 예전과 반대로 위의 형보다 더 커버렸다.
그랬다. 성장통이 꼭 있어야하고 반가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괴롭고 아픈 시간들이었다. 어디 몸의 성장통만 그럴까? 마음이 자라고 심성과 영혼이 성숙하게 자라야 하는데도 그 성장통은 꼭 필요하다. 안그러면 철없고 어리석은 유아기로 멈추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반드시 있어야할 성장통이지만 지나는동안은 아프다. 눈물도 나기도하고 누군가 주무르고 달래주어야 할수도 있다. 그래서 말이 생겼나? ‘아픈 만큼 성장한다!’고. 비가 오고 난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도 있고 겨울을 넘긴 씨앗이 봄에 꽃을 피운다는 ‘춘화현상’도 그런 의미다. 오히려 더 진한 색과 향을 내며 생명력이 강해진다는 말도 있다. 밟아주어야 겨울을 이기는 보리도 그렇다. 병아리가 온힘을 다해 껍질을 깨고 나오는 과정도 성장통의 하나며 조개가 상처를 참으며 진주를 만드는 과정도 성장통의 하나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자도 그럴지 모른다. 일생이 성장통의 순간들인지도. 어디 바라는대로 다 이루어지는 운명이 있던가? 착하게 산다고 반드시 이 땅에서 모두 복을 받기만 하던가? 그럴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쉽게 볼 수 있다. 성장통의 괴로움과 아픔을 수시로 견디고 품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우리들은 자라고 있다. 하늘나라 백성의 자격을 다지면서.
그래서 하나님은 쉴새없이 우리의 삶에 통증을 주시나 보다. 없으면 미숙한 유아로 살아야하기에 그러지말라고. 하지만 그렇게 유익하고 반드시 거쳐야 할 성장통의 삶도 몸과 마찬가지로 힘들다. 알면서도 고통스럽고 견디면서도 종종 눈물을 흘린다. 그러니 당연하다고 입 닫으라고 하는건 너무 심하다.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성장통도 당시에는 상처고 아픔이니까.
다만 위로하고 쓰다듬는 사랑의 마음이 더 필요하다. 같이 잠못자면서 팔다리를 주무르며 곁에 있어주던 부모의 마음으로. 돌아보니 아내가 아픈 수십년의 세월동안 나는 계속 성장통을 앓듯 힘들게 걷는중인 것 같다. 얼마나, 뭐가 더 자라야하는걸까? 그만 멈춰도 어른 대접을 받을 수는 없을까? 계속되는 성장통이 많이 힘들고 고단한데...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찾고 있는 고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옛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하늘에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 11장]
일평생이라는 긴 성장통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마치 이와 같다.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생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함에도 약속을 믿기에 멀리서 바라보면서도 기뻐하고 기꺼이 스스로를 나그네라고 고백하며 살아간 것과 같다. 그들이 나중 만날 완성된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지금의 성장통이 가져오는 고통보다 더 크고 두근거리게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