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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없는 변덕에 감사하며>

희망으로 2019. 6. 13. 11:27

<지조없는 변덕에 감사하며>

일이 있어 잠깐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무거운 짐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뛰는 아줌마를 보았다.
‘차 시간에 늦었나? 저러다 팔 빠지겠네...’
좀 도울까하다가 순간 무슨 생각에 외면했다.
‘그래, 땀도 흘리고 힘든 상황도 겪어야 담엔 미리 서두르겠지,
또 다행이 차를 타고 안도의 쉼을 쉴때 그 기분도 좋지!
목마른 사람만이 물맛의 감동을 느끼는 법이니까!’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만약 내가 다음에 다시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나라는 사람은 또 다른 이유를 대며 다른 반응을 할거라는 것.
이건 도와야지! 하며 짐을 들어주려고 말을 걸지도 모른다.
난 그렇게 기준도 원칙도 없고 일관성없이 산다
바람부는대로 넘어지고 때마다 감정도 예상을 못하게 변덕스럽다.
험한 시대라면 영락없이 간신이나 변절자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덕도 보면서 살았다.
한치 앞도 안보이는 풍랑같은 부모의 망한 삶에 끌려다닐때도
또 사랑하는 아내의 어이없는 난치병으로 가정이 폭싹 무너질 때도
나는 그 변덕스럽고 터무니없는 지조덕분에 뭉개고 견뎠다.
천덕스럽고 누추한 일상을 뻔뻔이 적응하면서 자존심을 눌렀다.
그리고 조금만 바람이 잠잠해지면 언제 그랬냐는듯 웃었다.
덕분에 어느 사이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갈대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살았다.
부러질망정 바꾸지 않는 기준이나 원칙 같은 건 멀리하고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도 없었다. 
단지 생명하나 유지하며 내게 딸린 가족들의 안전과 평안만 구했다.
그래서일까? 그 세월에 악다구니 표정이나 말을 보이지 않은 덕분에 
울 아이들도 그리 심하게 망가지지 않았다.
운명때문에 멍들고 상처받은 시간들이 있었지만 흉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지조없어 보이는 나의 갈대같은 순응을 감사한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죽은 듯 납작 엎드려 견디고
조금만 형편이 잠잠해지면 얼른 고개를 들고 히히덕 웃을 수 있었다.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풀이 되어 살았다. 
하늘이 내 수준에 맞게 주신 선물, 변덕과 적응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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