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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헤도 괜찮아 그래도 살라(갈말용 편집본)

희망으로 2018. 1. 29. 14:40

<실패해도 괜찮아, 그래도 살라! 왜냐하면...(갈말용수정편집본)>

# 나눔, 이유가 뭘까?

‘딩동!’

카톡으로 문자 하나가 왔다. 6개월의 프로그램 교육을 받고 소프트웨어 개발 업종에 일을 시작하는 아들에게 방 한 칸을 제공하고 싶다는 내용. 판교의 좁은 고시원 방에서 비싼 월 임대료를 내며 지내는 처지가 마음에 걸리신 것일까? 서울에 소유하신 다세대빌라의 반 지하 단칸방, 원룸 하나를 그냥 빌려주고 싶다고 하셨다. 출퇴근에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아들이 어떻게 결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너무도 고맙고 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받았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내가 아는 수도권 현실은 이렇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 지방 대학생이나 직장 초년생들은 방세 부담으로 한 달 수입의 3분의 1 이상을 지불하기도 한다고. 시간으로 따지면 한 달에 10일 이상은 단지 방세를 버느라 고스란히 바치는 셈이다. 그 고단한 현실은 다시 시간 부족 체력부족이라는 발목을 잡아 앞으로 나갈 여력을 없앤다.

그 분은 그런 고단한 객지생활을 하는 누군가에게 귀하게 쓰이길 바라며 이미 1년전부터 기도 하시는 중이란다. 마땅히 월세로 돈을 벌수도 있는 여유를 악순환의 굴레에 시달리는 누군가를 돕고 싶어 내놓는 나눔이 얼마나 귀한지. 도대체 그런 마음이 어디서 생기는 걸까? 그 분에게 나눔을 결심 하게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 문자를 받은 후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계속 잠기게 되었다.

‘오랜 불행에 점점 멀어져가는 많은 사람들, 뜸해지는 친척 형제들의 자리를 채우며 새롭게 다가오는 이 나눔의 사람들은 누굴까? 보내시는 이는 또 누굴까? 이유를 모르겠다.’

# 사랑, 차가움도 녹이는 봄

나는 참 차갑고 매정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남에게 신세지지 말고 동시에 간섭도 받지 말고 살자!’ 가 내 오랜 생활수칙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나를 변덕쟁이라고 부르더니 어느 날부터는 ‘걱정맨’으로 부른다. 그건 남을 쉽게 신뢰하지 못하고 매사에 불안하고 의심하고 못마땅해 하며 산다는 빵점의 다른 표현이다.

나도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들의 욕심과 판단실수, 시대의 큰 흐름이 만든 사업파산의 불행이 내 어린시절을 덥쳤고 홀로 세상에 내동댕이 쳐지면서 그 결과로 생긴 부작용이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동시에 남의 속임수에도 안 당하며 살아야하는 현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안타깝게 신앙스타일조차 그런 방식이 되고 말았다. 사람에게 기대거나 믿지 않는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하나님에게조차 기대지 않고 홀로 서는 것이 성숙하고 훌륭한 신앙이라는 고집에 빠진 것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분의 울타리로 냉담하게 격리를 하고 살았다. 그게 올바른 자세고 잘난 수준의 신앙인줄 굳게 믿었었다.

아내가 희귀난치병이 걸리고 가정은 폭탄을 맞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불행이 더 심해질 수 있을까 싶은 바닥을 치면서 오히려 고집스러운 홀로서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 수치스럽고 못난 사람이라는 엉터리 기준을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는 아픈 아내와 아이들을 길거리로 데리고 나가 굶겨 죽이거나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때부터 “고맙습니다!”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넙죽 절하며 남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나눔이 구차한 것이 아니고,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결코 흉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따뜻한 사람들이 베푸는 사랑은 굳어지고 얼어붙은 생명을 녹이는 봄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 실패, 기준도 순서도 없는 공평함

너무 괴로워 땅을 치고 울고 싶었던 때는 “왜 나만?” 하는 억울함에 힘들었고, 닥친 고난을 내가 잘못 살아서 당하는 징계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성경 속에서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거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건 당연히 햇빛과 비만이 아니라 살면서 생기는 좋은 일과 궂은 일, 행복과 불행도 누군가를 정해놓거나 순서대로 주는 벌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나도 하나님을 오해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홀로 버텨내고 이겨내기를 원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약해지는 내 모습은 상대적으로 죄가 되고 성공 못하거나 가난을 못 벗어나면 무능한 신앙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잘 따라오지 못하면 벌을 내리는 무서운 하나님쯤으로 느끼기도 했다. 내가 하나님을 많이 오해했다.

[그때 1달란트 받은 종이 와서 말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굳은 분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곡식을 모으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운 나머지 나가서 주인님의 돈을 땅에 감춰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주인님의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대답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곡식을 모은다는 것을 안단 말이냐?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했을 것 아니냐? 그랬다면 내가 돌아와서 그 돈에다 이자라도 받았을 것이다. - 마태복음 25장 24절~27절]

1달란트 받은 종은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단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늘 완벽해야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살았다. 딱 나처럼. 하나님이 손익을 따지지 않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생각은 죽어도 못했다. 그러니 실패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나친 욕심이나 무능함으로 오는 부끄러운 결과로만 알았다. 심지어 그런 사람을 보면 속으로 무시했을지 모른다. 딱 나처럼. 종종 실패는 기준이 있어서도 아니고 순서를 정해서 오는 것이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 희망, 불행과 가난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

블로그나 갈말 게시판에서 사용하는 내 닉네임은 ‘희망으로’다. 아내가 아픈 후에 지은 것이 아니다. 아내가 아프기 3년 전인 2005년에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내가 지은 별명이다. 그런데 이후에 어쩌다 그 이름대로 살아야하는 운명이 되었다. 내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운, 의지가 있다면 늘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종종 어떤 생각에 잠긴다. ‘희망으로’의 ‘희망’이 막연한 어떤 성공, 회복의 상태가 아닌 것 같다는. 그러면 나는 도대체 이 닉네임을 쓸 때마다, 누구에겐가 ‘희망으로님!’ 하고 불릴 때마다 어떤 종류의 희망을 머릿속에 바라는 걸까? 늘 떠나지 않는 질문을 담고 살면서 조금씩 내 닉네임 ‘희망으로’ 속의 ‘희망’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부자로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늘 이기며 성공하는 것만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원하시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다보면 빛과 그림자처럼 쌍으로 따라붙는 질문이 하나 있다.

나를 힘들고 좌절하게 하는 것이 꼭 가난 때문일까? 질병만일까? 실연 탓일까? 혹은 사업실패 낙방일까? 전부는 아니라는 답이 살아갈수록 점점 선명해진다. 일단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 있어도 괴롭고, 또 걸어 다니는 건강을 가져도, 직장과 사업을 가지고 살아도 얼마나 원망과 미움을 안고들 사는지를 지켜보면서..., 물론 그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모두 몰려온다면 상당히 불행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꿋꿋하게 사는 사람도 분명 있고.

어느 드라마에서 그랬다. ‘꿈이나 희망 같은 건 바라보며 힘내고 행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멀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우울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숱한 날들을 그놈의 꿈과 희망, 목표 때문에 오히려 좌절하고 괴로움을 당한다. 때론 세상과 남들이 강요하는 꿈과 희망 때문에 바보같이 비관하기도 한다. 희망 사용법을 잘 몰라서 에너지가 아니라 흉기로 사용하며 사는 꼴이다. 고작 드라마에서도 그런 지혜를 아는데 신앙인들이 신앙의 진리를 꿈꾸면서도 그걸 모른다니 안타깝다.

‘나에게 ’희망으로‘ 살기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라는 의미가 되었다. 하나님이 곧 희망인 것이다. 희망=하나님!’

# 불행해도... 그래도 살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좌절 없이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절망의 끝에 희망이 있다. 마찬가지로 슬픔의 땅이 없이는 그 땅에서 피어나는 기쁨이라는 나무는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이 고맙고, 목마름 갈증이 없는 사람은 생수의 고마움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불안도 슬픔도 외로움도 모두 우리를 하나님께로 밀어붙이는 동력이다. 그 자체가 복이라거나 감사할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마냥 원망하고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이유로 삼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자는 자주 상상만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꺼내서 주인에게 주다가 된통 당한 종처럼. 실패를 하면 안 된다? 신앙인은 가난하게 살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 걸까? 아니다. 실수해도 된다. 그리고 불행해도 살아야한다. 또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이 복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까지 했다. 그래야 한다고 달란트 비유를 들어가며 열심히 살라고 예수님이 말하신다. 실패가, 불행이, 가난이 무섭다고 움츠리고 살면 그때는 진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호되게 야단을 맞는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시도하는 사람만이 환경과 운명이 흔들어도 망하지 않고 홀로 살아 낸다. 가난과 불행, 질병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홀로 서는 법을 배운 사람은 반드시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나눔과 사랑을 부작용 없이 베푼다. 가난 속에서도 동행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고, 고난 속에서도 뜨거운 온기로 안아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 에스겔 16장]


‘그러니...실패해도 괜찮다. 살림이 누추해도 괜찮다. 바닥을 기고 있는 중이라도 살라! 하나님은 늘 희망으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