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가?
오래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부자로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늘 이기며 성공하는 것만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원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나홀로 버텨내고 이겨내기를 원하는줄 알았다
내가 하나님을 많이 오해했다.
완벽주의자는 상상만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주인이 맡기고간 데나리온을 활용하는 종들의 이야기에 ㅇ 나오는 한데나리온을 땅에 묻었다가 내놓은 종과 가탇. 야단 맞지 않겠다는 완벽주의 주인이 무섭다는 상상을 행동으로 옮긴 경우가 해당된다.
실수를 하면 안된다?
바둑을 배우려면 바둑에 관한 이론서를 50권 정도는 떼고 시작하는게 맞는 길일까?
받 ㄱ판과 돌을 앞에 놓고 탑도 쌓고 오목도 두고 돌까기도 하면서 놀기 시작하는 것이 더 행복할까? 받 ㄱ자체가 놀이고 재미고 신나자고 하는 것인데.
실수해도 된다. 불행해도 살아야한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향기, 세상에 묻히다>
누구 자식인들 안 이뻤을까?
세상에 첫 만남으로 태어나던 그 날에
향기만 가득하고 흠없는 꽃이던 그 날에는 우리 모두도.
세상은 만만치 않아
어느날은 사나운 바람으로 칼날의 추위로
때로는 캄캄한 밤의 외로움으로 닥쳐와
향기를 움추려들게 했다.
해가 나면 해를 따라 기운을 내고
메마른 날에는 갈증에 허덕이며
온갖 강렬한 악취와 죽어가는 공기들 속에 살았다
그렇게 세상의 긴 시간을 버티는 동안
더 이상 꽃일 수 없는 험투성이 생명이 되고
문득 하늘에서 오는 바람 한줄기에 환상을 본다
아주 오래전 가졌던 꽃의 시절을
하지만 이제는 추억처럼 흐려진 상실
향기, 세상에 묻히다.
다시 살아나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불안도 슬픔도 외로움도 모두 우리를 하나님께로 밀어붙이는 동력이다.
그것들이 복이라거나 감사할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마냥 원망하고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이유로 삼지는 말아야란다는 것이다
가을은 사랑에 빠진 하나님의얼굴
<사랑, 믿음, ...대부분 설득의 문제>
나는 참 차갑고 매정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나도 스스로 인정하지만 가족들 또 주변 시나간 사람들도 비교적 그렇게 느꼈다. 아이들은 나를 변덕쟁이라고 부르더니 어느날부터는 걱정맨이라고도 부른다. 그건 남을 쉽게 신뢰하지 못하고 매사에 불안하고 의심하고 못마땅해한다는 다른 표현이다.
그런대도 나의 또 다른 면, 내가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면이 있다. 그건 곧잘 사랑에 흠뻑 빠져 주체를 못한다는 점이다. 때로 그것은 대상이 음악이나 영화, 책이기도하고 여행지의 풍경 건물 음식이기도 하다. 남들이 보통 좋다!하는 정도를 넘어 광적으로 몸살을 앓을 정도로 반응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날은 노래 한곡을 3일 반 정도를 반복해서 듣기도 하고 어느 영화 하나는 10년에 걸쳐 수십번을 보기도 한다. 잔치국수 된장찌개를 (물론 90% 정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밀어내고 딱 그맛이라야 해당되지만) 시시한 애인보다 더 좋아라 찾아다니며 좋아한다. 좋아해도 스스로 태연하게 대하지 못하는 그런 거 보면 포로 상태를 넘어 노예 비슷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린왕자는 어느 날 지는 노을을 보느라 몇 번이나 의자를 끌어 옮기며 바라보았다. 무척 외로웠다고 느낌을 말했지만 노을이 주는 어떤 감정에 설득당한거다.
사람 중에도 그런 푹 빠지게 하는 대상이 가끔 나타난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나 어른이거나 관계가 없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 이름을 떠올리고 얼굴을 생각하면 마구 보고싶어지고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사람. 그러면 나는 뭐든지 주고싶어지고 말 걸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져서 안달을 한다. 옆에서보면 딱 지나치고 저러다 상처받지 걱정스러운 정도로. 그런데 대부분 그런 사람을 좋아하다가 배신감 든 비율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기준 행동ㅇ르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정답은 내가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상대쪽이 나를 좋다고 하기보다는 내쪽에서 사랑한다고, 미치도록 좋다고 마음속으로든지 말로든지, 행동으로 그랬기 때문에 깨질 위험이 덜하다.
그 모든 고백들을 이끌어 낸 것은 무엇일까? 차갑고 매정하며 삶에는 회의적이며 세상은 비관으로 보는 나를 사랑하고 믿고 가슴 뛰어서 다가가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설득일거다. 노래의 가사나 음률이 주는 감정에 설득되고 영화의 스토리나 주인공의 입장에 설득당하고, 음식의 특별한 맛에 설득되고 여행지의 어떤 느낌 풍경들이 나도 잘 모르고 살았던 내 속의 어떤 잠재적 동감을 부른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일거다. 그래서 나는 차갑고 비관적이며 불신덩어리에도 불구하고 견디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니가 좋다고 보고싶다고 붙들고 매달리며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대상이 없거나 아주 작을 때, 삶은 힘들고 사람은 피하고 싶을만큼 나를 피곤하게만 한다. 별 사소한 걱정거리도 열정없이 불안과 불평ㅇ르 가져오는 큰 괴물처럼 커진다. 왜 이리 살기 힘들어? 피곤해...를 연발하고 입에 달고 살게한다. 사람은 물론 신도 믿는 이가 없으니 무종교 상태가 되고 설사 오래 전 가입한 종교가 있다해도 죽은 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사랑은 말라 비틀어진 3류소설같이 멀게만 느껴지고 꿈이나 희망은 칼라는 없는 온통 우중충한 회색 한가지 색깔로만 그려진 그림이 되고 만다. 그 모든 대상들이 나에게 설득력 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될 때 망하고 힘들어지는 건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 생명 내 인생이 온통 문제투성이가 되고 만다.
정말 나를 힘들고 좌절하게 하는 것이 재산일가?
질병만일까? 실연일까? 혹은 사업실패 승진누락일까?
그렇다면 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하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이다.
일단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모든 사람은 제외될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무도 고통없이 잘살까? 반대의 가난한 모든 이들은 울고 좌절하며 불행에 몸부림치며 살까? 가난한 제3세계의 모든 나라는 통째로 불행할까? 그렇지 않다는 통계조사를 봐도 그렇지 않다.
비슷한 질문으로 보면 질병을 가지지 않은 건강한 모든 사람은 행복할까? 그것도 아니다.
사업은? 승진은? 명예는? 얻은 사람도 괴로워하고 얻지 못한 사람도 잘 살기도 하는걸 보면 그건 절대적 기준은 아닌게 분명하다.
물론 그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모두 몰려온다면 상당히 불행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럼에도 굳굳하게 사는 소수의 사람도 분명있고.
어느 종류를 불문하고 한가지도 설득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절망적이기는 하다. 설득당한 후 고백을 통해 사랑도 믿음도 열정도 생길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때문에. 그러면 사는 게 힘들고 피곤하고 외롭다.
모든 관계는 설득의 문제다
종교도 교육도 사랑도 정치도!
설득을 더 잘하는 정치인에게 주는 표가 한 국가의 정치를 좌우한다.
홍보에 설득당해 돈을 주고 무엇을 사면 쇼핑이 된다.
호감에 설득당해 자주 보기 시작하면 연애가 시작되고
프로포즈에 설득당해 고백을 하면 결혼하게 되고 가정이 시작된다.
일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이 음식 아니면 저 음식, 이 학교 아니면 저 학교, 이 길 아니면 저 길, 이 사람 아니면 저 사람. 심지어 이 신(종교) 아니면 저 신(종교). 그 모든 선택들 직전에는 설득이 있다. 무엇에 설득 당하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고 그 선택의 연속에 다라 한 사람의 일생, 한 나라의 운명도 달라진다. 사랑도 믿음도 일생도 설득에 달렸다.
아, 설득당하고 싶다. 어떤 분야든지 몇 번이든지! 그래서 미치도록 사랑하고 푹 믿고 안심하며, 더 먼 곳까지 꿈꾸고 더 행복할 희망에 가슴 설레며 살고 싶다. 더 많은 노래들과 영화에 온몸 짜릿하며 신나게 살고 더 많은 여행지와 음식들에 감탄하며 날마다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감탄하며 살고 싶다. 더 깊은 가르침과 더 넘치는 신의 사랑에 흠뻑 빠지며 감사와 아멘을 달고 살고 싶다. 곁의 사람들을 보고 돌아서면 금방 또 보고 싶어 하며, 음식을 나눠먹고 생활을 나누며 수다도 떨며 살고 싶다. 더 이상 얼굴보는게 피곤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숱한 날들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과 공포증에서 해방되지 ㅇ낳ㅇ르까? 작은, (혹 조금 더 심한들) 질병과 좀 모자라는 가난일지라도 걱정 뚝 떨치고 웃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하늘은 모두에게 연결되어있다 죄인이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아픈사람이거나 건강한 사람이거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은! 그렇게 하늘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설득을 하는데 설득에 반응하는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어느 사람은 꾸벅 절하고 어느 사람은 대놓고 흥! 하며 고개 돌리고, 또 어떤 사람은 말이야 맞지만...하며 끝없이 꼬리를 틀어 계속 반신반의 한다. 설득하는 쪽의 문제가 아니라 설득을 받는 쪽의 심각한 문제다. 뭐가 결함이 있어서 생기는 다른 반응일까?
어느 드라마에서 그랬다
꿈이나 이상, 희망 같은 건 생각하면서 바라보며 행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멀어보이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울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숱한 날들을 그놈의 꿈과 희망, 대로 목표 때문에 좌절하고 숨 허덕이며 괴로움을 당한다. 세상과 남들이 강요하는 타의적 꿈과 희망도 있고 스스로 욕심과 착각으로 세운 꿈과 희망에 시달리기도하고. 그러지 말라는데 사용법을 잘 모르고 양식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흉기로 사용하며 사는 인생이 된다. 스스로 설득당해서 더 활기차게 살면 좋을 일을 스스로 비관적으로 삐딱하게 뿌리치며 가혹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행동과 비슷하게.
고작 드라마에서도 그런 지혜를 아는데 신앙인들이 신앙의 진리를 꿈꾸면서도 그걸 모른다니...
홀로 서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함께 사는 생활을 시도하는 사람만이 홀로 살아도 문제가 없다.
절망의 끝에 희망이 있고
슬픔의 끝에 기쁨이 달려있다
배고픈 뒤에 배부를수이ㅛ고
목마름 갈증이 없이는 생수를 느낄 수가 없다.
독감은 사랑하기도 힘들게하더라
태양계에서 태양은 전체 질량의 99.866%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0.134%가 기타 행성들과 위성들의 질량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의 질량을 전부 합해도 태양의 0.2%도 되지 않습니다. 그 중에 지구, 그리고 한 사람의 무게는? 입김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속임수입니다. 태양의 질량에 비하여 무게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인생을 의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의지할 분을 의지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손길로 만들어지지 않는 우주는 없습니다.
향기 바다에 빠지다
한 분이 연락을 해오셨다. 둘째 아들에게 방 한칸을 제공하고싶다고. 아이가 일하는 판교에서 출퇴근에 시간이 좀 많이 소요되어 고민중이지만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던지 상관없이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눈물겹게 감사하다. 만약 아들이 사용하지 않으면 마땅한 다른 대상자를 찾아 제공을 할 생각이라며 거의 1년을 기도해오는 중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세대빌라 한채가 보통 5~7개의 방을 가지니 집의 십분의 일을 넘는다. 수입의 십일조보다 어려운 방 나눔 십일조를 드린다는 존경심이 솟는다.
서울에서 방 한칸을 구해서 생활하려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지방대학생들이나 직장 초임자들은 거의 한달 수입의 3분의1 가까운 금액을 방세로 지출해야하는 실정이다. 돈으로 따지면 실감이 덜 나지만 한달 30일 중 10여일을 오직 숙식비용 마련을 을 위해 보낸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한 젊은이의 삶에 얼마나 큰 자비인지, 고마움인지 모른다.
도대체 그런 마음이 어디서 생기는 걸까? 돈을 벌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잘 곳이 없거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허덕이며 꿈을 미루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나눔을 실천하는 결심을 하게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신앙의 힘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여러가지를 계속 생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