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떤 선택이 기다릴까요?
<오늘은 어떤 선택이 기다릴까요? >
1. 딱 5초의 시간만 주세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피난처가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장소가 되었든...’
그래야 숨 막힐 때는 그 피난처에서 숨을 쉬고, 울고 싶을 때는 눈치 보지 않고 울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저와 아내에게 병원 근처에 쉼터 방 하나를 마련해주신 후원자분들은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춥습니다...’
길이 아직 어둑한 이른 시간, 아침밥도 먹기 전 병실을 빠져나와 쉼터 방으로 향했습니다. 간병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챙겨오려고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춥습니다...’ 한기가 매섭게 파고듭니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올라옵니다. 서러움일까요? 슬픔일까요? 몇 달을 계속 이어지던 수술과 수술,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유목민처럼 이동하면서 쌓인 고단함 때문일까요?
“딱 5초의 시간만 주고 바로 떠나게 해주셔요!”
만약 누가 나에게 죽는 방법을 선택하라고 기회를 준다면 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딱 이 두 마디 기도만 할 시간, 5초 정도만 주면 별안간 세상을 떠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달, 혹은 석 달만 남았습니다!’ 하는 사형선고라도 좋으니 남은 시간을 좀 주셔서 주변 정리를 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복을 받았으면 싶었습니다. 미처 가족과 인사도 못 나누고 비명횡사란 얼마나 비통하고 안타까울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픈 아내와 동행하면서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희망 없이 죽음을 향해 시시각각 달려가며 산다는 것은 결코 복이 못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는 시한은 고사하고 죽는 시한도 없이 내리막길만 확실히 달려가는 느낌의 삶이란 참 고역입니다. 온갖 고초를 참으면서 마지막 생을 향해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차라리 짐작도 못하다가 5초만 주어지고 가는 것이 복되다 싶었습니다. 선택으로 그게 가능하다면요...
2. 결정 장애 때문에...선택을 못하겠어요!
“짜장면?
아냐, 짬뽕!
아, 짜장면도 먹고 싶은데...”
참 많은 사람들이 하는 고민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짬짜면’이 나왔습니다. 공간을 반으로 나눈 그릇도 나오고. 비슷한 메뉴로 후라이드와 양념 반반치킨도 있고, 여름이면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아직도 안 정했어?”
“아빠, 난 결정 장애가 있나봐...”
딸아이는 편의점을 들어가도 고민합니다. ‘초코우유? 바나나우유?’, 옷이나 신발 사러 들어가서도 그럽니다. ‘흰색? 검정색?’ 문득 이전에도 바닥난 인내심으로 분노(?)를 참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엄마에게서 유전? 참다못한 나는 급기야 두 가지를 다 사주고 그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탈출을 하곤 했습니다. 불쌍하게도 얇아진 빈 지갑을 부여안고.
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해야할지 고민이 되면 아무 것이나 선택해도 별 문제 없습니다!’ 라고. 팽팽하게 고민을 한다는 것은 사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아예 한쪽으로 쏠리면 누구도 고민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래서 심지어 동전던지기로 결정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선택을 한 다음부터입니다. 결정내린 그 대상에 모든 노력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 결과가 잘되면 제대로 선택한 것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모든 선택의 결과가 다 잘된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다만 선택하느라 너무 시간이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결정한 이후에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것과는 또 다른 한 종류의 선택이 있습니다. 이미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지 상식처럼 정해져 있는 데도 고민을 하는 이상한 경우입니다. 선악의 길, 종교의 선택, 배신과 순종의 선택 등이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옳은지를 누가 모를까요? 다만 남의 일 아니고 내 일이 되니까 그렇고, 말로 끝나는 거 아니고 그 결과가 내 생명을 좌우하니 고민하는 거지요.
이런 선택의 고민에 빠질 때면 이재철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선택은 버림의 결과다!’ 라던 말. 사실 모든 선택은 늘 그렇습니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알지만...”
“아까워서...”
사람의 깊은 바닥에는 아마 지독히 질긴 욕심이 웅크리고 있나봅니다. 그래서 상식적인 선택을 못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거지요. 옳은 길과 이득이라는 때론 배반적인 상태에서 이중심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자발적으로 최선을 결정 할 수 없을 때는 어느 것을 버릴 지를 정해보는 것도 방법이 된다는 의미 같습니다.
3. 생각이 달라졌어요! 5초 말고 좀 더요...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일지 모를 숱한 선택들을 거듭합니다. 먹는 메뉴 같은 작은 것과 진로를 결정하는 큰 것 등. 인생은 그렇게 하나하나의 선택이, 하루 하루치씩 쌓여서 이루어진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한 때 유명했던 모 전자회사의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광고카피가 유행이었습니다. 어떤 선택은 길게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떤 하나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경우보다는 쌓여진 선택의 총체적 모양이 인생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비슷한 대상을 놓고 고민할 때 선택은 아무 것을 해도 된다. 그 다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던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직업을 결정할 때,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정할 때, 자기의 이익과 성공을 보장하는 직접적인 길보다는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안전해지는 길을 선택했다고. 주위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자기만 넉넉해지고 웃고 사는 것은 아무래도 찜찜하고 불완전해 보여서 자기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면 그것이 더 자기의 행복을 튼튼하게 유지해줄 거라고 믿었다면서.
“내 아내가 고통스러워서 불편합니다. 내 아이들이 위태롭고 안쓰러워 배부르게 먹지도 못하겠습니다. 어찌해야하나요?”
그랬습니다. 나도 아내가 좀 더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럽게 되어야 편히 잠을 잘 것 같습니다. 내 아이들이 좀 더 웃고 잘 지내야 나도 먹고 쉬고 웃음이 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 행복은 살얼음 위의 놀이가 될 것이고 어두운 그늘에서 고개를 돌리며 맛보는 억지 햇살이 될 것입니다.
그런 길을 진작 알고 먼저 그 방식의 삶을 사신 분들이 아마도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분들일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롤모델인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자신의 부귀영화 평화보다 우리의 용서와 평안을 위해 모진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 길이 결국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진실한 행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러셨을 겁니다.
쉼터인 방에서 병원으로 돌아오면서 나의 소원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딱 5초 만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참 고통 없고 편한 방법은 틀림없지만 내 마지막은 그렇게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으로. 딱 5초 만에 죽음을 맞이하는 선택 대신 좀 더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역할을 한 다음에, 덜 아쉬울 마무리를 한 다음에 가족과 평화로운 이별을 나누며 죽음을 맞이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4. 선택에는 순종의 의무도 따르네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의 선심이 아님은 물론이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놀이 같은 건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보호받을 권리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이들은 보호해야할 부모가 의무를 다하는 동안 부모가 부탁하는 말에 따라야 할 순종의 책임이 있습니다. 제 마음대로 천방지축 날뛰어버리면 부모도 보호를 해줄 길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야할 의무를 다하시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따라야할 순종의 책임이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를 포기하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혼자 살든지.
나의 쉼터, 피난처를 다녀오면서 나를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님과 이웃의 기대를 느낍니다. 이런 저런 약한 스스로를 돌아보면 저는 완전히 독립해서 잘 살 여지가 없는 생명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보호와 계획을 따라서 살아야지 어쩌겠습니까.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며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은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겁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줍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나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 시편23, 쉬운 성경]
이 땅에서는 아내도 아이들도 나를 피난처로 여기고 삽니다. 그러니 나만의 성공,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 아내, 아이들, 이웃들의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위해 선택해야겠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질 때 제 행복도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함께 기뻐할 테니까요. 음식메뉴든지, 나들이든지, 혹은 죽고 사는 괴로움을 견디는 것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