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기적이 있냐고 질기게 묻는 사람, 그럼 나는?..

희망으로 2017. 7. 6. 18:06

<기적이 있냐고 질기게 묻는 사람, 그럼 나는?...>


"정말...기적은 있는 건가요?"
"예! 저는 믿어요"
"그런데 그게 나에게 온다는 보장은 있나요?"
".............."

아내와 같은 종류의 병을 가진 분이다. 그리 심한 편이 아니지만 불안해서 도움말을 부탁한다면서 끝없이 내게 기적이 존재 하냐고 반복해서 묻는다. 처음에는 내가 그렇다고, 우리가 그 증인이라고도 해보았지만 도무지 믿지 않는다. 하루만 지나가면 다시 진짜 기적이 있느냐고 또 묻는다. 말이 소용이 없다.

아내의 정도에 비하면 훨씬 건강한데도 더 비관적이다. 기도, 예배, 무엇이든 모든 초점을 오로지 기적이 일어날 지에만 매달린다. 심지어 기독교가 자기와 맞지 않는 게 아닌지, 종교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지를 고민한다고도까지 내게 말할 때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서 침묵했다.

"정말 기적이 있을까? 혹시 내가 믿었던 기적이 그저 조금 큰 행운은 아니었을까?"

자꾸 반복해서 생각하다보니 나도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세번만 계속 들으면 시장 한복판에도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헛소문도 믿어진다는 옛 속담도 있다더니 내가 그랬다. 신뢰가 반복을 통해서 생기듯 불신도 반복을 통해서 생기는 것을 체험했다.

믿음은 기적이 오지 않을 때도 신과 우리가 모두 여전히 소중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기적이 없어도 우리는 무엇인가 할일이 있고 그럼에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가 성공으로 끝을 맺고, 불행이 사라지고 불치병이 낫는 반전으로 나타나야만 기적일까?

기적은 분명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와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걸 위해 신과 종교가 있다면 그건 머슴신이거나 돈 받고 물건을 주듯 하는 상인종교일 뿐이다. 그리고 기적의 기준도 좀 바뀌어야 한다. 실패와 불행, 질병중에도 변함없이 안고 살아가며 하는 감사, 사랑, 돌봄. 이런 것이 더 큰 기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말했다 이적과 증거를 끝없이 요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고기뱃속에서 사흘을 죽은 듯 지냈다가 살아 나온 요나,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적보다 큰 기적은 없다는 말. 오롯이 피와 살이 찢어지는 고문과 죽음을 뻔히 미리 알고도 피하지 않고 그 길을 가서 죽은 결단, 세상에 그보다 큰 사랑이 없다. 그보다 큰 기적이 어디 있다고...

기적은 꼭 내게, 나를 위해서만 있어야 한다는 건 기적의 선한 동기와 모순되는 욕심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거나 모두를 위한 것도 값지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장에는 손해 보는 것 같이 보이는 돌아가는 기적이, 고작 이승의 백년을 잘 지내자고 육신에 내리는 기적보다 백배 천배는 더 크고 중요한 것이다.

제발 그분도 좀 관점이 이동했으면 좋겠다. 병이 없고 형편이 넉넉해도 평안이 수시로 위협을 받는 험한 세상살이인데 끝없이 기적만 바라고 매달리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 조금만 잣대를 내려 보니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건 하기 좋은 말이고, 듣기 좋은 말이고...' 노력보다 큰 행운을 바라고, 굳이 꼭 필요하지 않아도 남만큼, 혹은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나, 아...나도 신뢰와 평안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불길함이 몰려온다.)

- 부디...'요나의 기적'이 실패와 불행속에서도 버티고 살아가는 나에게 힘이 되기를, 그래서 반전이 없어도 감사할 수 있는 '요(기) 나의 기적'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