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사람의 일생은 그냥 24시간, 비관을 밀어내는 하루의 반복!
희망으로
2017. 6. 10. 09:45
<사람의 일생은 그냥 24시간, 비관을 밀어내는 하루의 반복!> 정말 바삐...서둘러 막 걷고 막 씻고 후다닥 돌아와야 합니다. 이미 빨간 경고장을 받은 간수치 때문에 울면서도 겨자를 먹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두 시간이 넘도록 여유 있게, 그것도 자발적으로 걷기도하고 공원에 그저 앉아 지나는 사람 구경하며 쉬기도 하고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운동하러 간 다섯 번에 한 번은 아내가 빨리 차버리는 소변을 못 견뎌 땀을 흘립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얼굴이 하얗고 붉게 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나는 속으로만 억울해 중얼거립니다. ‘한 시간 조금 넘었구만...’ 그러니 이제 한 시간을 넘기면 마구 불안해집니다. 횟수는 다섯 번에 한 번 정도만 그러지만 문제는 그 한 번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거. 그러니 다섯 번 전부가 그러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립니다. 마치 교실에서 돈을 잃어버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면 모두가 용의자가 되듯. 아버지도 딱 한 번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딱 한 번 돌아가십니다. 배우자도 그렇고 자녀도 친구도 모두 그렇습니다. 그렇게 단 한 번 세상을 떠나지만 우리는 그 때를 모릅니다. 그러니 심하게 아프거나 심지어 오래 보이지만 않아도 철렁 합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당한 상황에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철렁하며 삽니다. 그러니 과학과 수학적으로는 단 한 번인 죽음의 두려움이 숱하게 많아집니다. 그 정확한 순간을 안다면? 그러면야 당연히 우리는 딱 한 번만 걱정하고 슬퍼하며 살겠지요. 곰곰 생각해보면 죽음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공도 그렇고 실패도 또 그렇습니다. 성공할지 못할지, 혹 망하거나 실패하는 게 아닐지 두려움으로 늘 조마하며 삽니다. 최고로 성공할 때와 최악으로 실패할 때를 안다면 그 때만 반응을 하면 되는데. 그 때를 모르니 때마다 덜컥 긴장하며 평생을 그렇게 보냅니다. 마치 빨리 돌아와야 할 한 번 때문에 다섯 번 모두를 늘 서두르는 운동처럼. 사는 과정이 늘 그럴진대 '인생 새옹지마'의 노인처럼 전부를 관통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그것은 하나의 좋은 방법이며 동시에 현명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길게 전체를 보며 사는 자세. 그러면 한결 안정감을 가지고 실수도 줄이며 살 수 있겠지요? 성경도 그런 삶의 태도를 늘 가지라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파요 오메가라 했지요. 시작과 끝이라는 전체를 동시에 컨트롤하며 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어디나 언제나 계신다는 표현도 그런 말이겠지요. 성경 여러 곳에서 사람은 풀과 꽃 같지만 말씀은 영원하다고 하시고 죽음 이전과 이후가 별개가 아니라는 말을 숱하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땅의 삶만 전부인 줄 알고 살아서 하나님과 자주 부딪힙니다. 사람은 참 안 변합니다. 한 번 좋은 말을 들었다고, 맞다! 무릎 치며 안다고 그렇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야지 고백하고도 일생을 한 시선에 담고 느긋하게 살지 못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런데 왜 알아도, 들어도, 생각했는데도 늘 상황 앞에 놓일 때마다 우리는 일희일비, 놀라고 탄식하고 또는 반대로 기고만장하고 착각할까요?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인생을 지나면서도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되지 않고 많이 다르게 반응하는 차이가 생깁니다. 누구는 그 여러 번의 다른 상황을 계속 긍정적으로, 누구는 계속 비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그건 타고난 기질, 타고난 성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같은 형제 안에서도 가인과 아벨도 나고 에서와 야곱도 나오며, 심지어 같이 먹고 자며 동행하던 예수의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와 유다로 갈라지겠지요. 사실 선천적 기질, 선천적 성품이라고 할 때의 '선천적'은 그야말로 우리가 나기 전의 결정입니다. 이 영역, 내가 태어나기 전 이미 주어졌을 기질, 능력, 성품, 여건까지도 내 선택의 대상도 아니고 책임질 범위도 아닌 데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차등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따라오는 괴로움도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꿈꾸는 멋진 결과가 잘 안되거나, 실패, 가난 등에 마주치면 우리는 몽땅 자신에게 참 잔인하게도 문책하고 비난하고 우울해집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시작과 끝 안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과, 정말로 우리가 각자 타고난 다른 재능과 성품과 기질 때문에 삶도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훨씬 덜 절망하지 않을까요? 실패를 만나서 절망이 아니라 아주 작은 한 순간임을 기억하고, 이별을 만나서 고통과 슬픔만이 아니라 끝이 아님을 믿고, 가난을 만나도 남보다 출발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는 이해를, 그런데 그럴지라도 한 가지는 반드시 우리가 선택하고 책임지고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견디고 안고 가는 훈련입니다. 어떤 부모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주었다고 해도 우리는 살아내라는 공평한 명령을 받고 이 땅의 생애를 시작한 것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 땅에 오겠다고 결정한 기억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라면 예외지만 아니라면 모두가 그 명령을 따라야합니다. 그 명령은 우리를 가두려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가 좁아진 식견 때문에 고통스럽게 사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깨닫고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생명의 주인에게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시계를 연신 보아가며 한 시간을 넘기지 않으려고 바삐 걷고 바삐 씻고 병실로 돌아왔습니다. 그 분주함이 비관의 이유라면 짜증내며 집어치우면 되겠지요. 그러면 몸은 점점 나빠지고 간경화 간암 등이 차례로 저만치서 나를 기다리겠지요. 하지만 나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려다 생기는 일이니 인정하고 전체를 보려고 합니다. 적응하고 노력하고, 그래도 생기는 장애와 갈등은 어쩔 수 없으면 그냥 안고 가기도 하고. 그렇게 하루를 그저 남보다 조금 많이 타고난 비관적 기질과 불행한 처지와 싸우며 삽니다. 알고 보면 사람의 일생은 그저 하루에 하루를 더하는 반복일 뿐입니다. 어마하게 길거나 거창하지 않고 겨우 24시간, 다시 시작하는 또 24시간, 그게 전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