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간병일기 3268일 - ‘병 주고 약 주는 분?’

희망으로 2017. 4. 20. 18:43



< 간병일기 3268일 - ‘병 주고 약 주는 분?’>

오전 - ‘사흘마다 부활이 필요해...’

자기만 알고 염치가 없는 한 사람이 나를 흔들어 놓았다. 내 속에서 부글 끓어오르는 온갖 정의롭고 똑똑 부러지게 따질 말들이 칼날처럼 떠오른다. 아무도 틀렸다고 대들지 못할 내용이지만 폭언이고 사람을 상처내고 능히 죽일 말들이...

그러나... 난 이미 졌다. 바깥으로 어떻게 판정승을 하든 말든 내 속은 무참하게 일그러지고 평화가 사라졌다. 너그러움이 없고 자부심이 없는 말싸움의 승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몸은 24시간 병실에서 간병으로 지치고 마음은 누더기가 되어버린 채 오래 산다는 게 의미가 있나? 늙으면 죽어야하고 실패하면 죽어야하고 심지어는 질병에 걸려도 빨리 죽는 게 주위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염치 있고 지혜로운 사람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들이 몰려온다. 부활의 아침이 오고 사흘도 채 못 넘기고 다시 캄캄한 죽음의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인간이로구나! ㅠㅠ’

아내의 긴 화장실 사용으로 누군가의 시비를 받았다. 좀 인지기능이 떨어진 노인네라 터무니가 없기도 했다.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 못 배우고 천덕스럽고 사납고 소탐대실하고... 정말 징그럽게 싫어지는 소위 천덕스러운 약자들의 습성, 길다면 긴 불행 속에 뒹굴며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닮아가는 건 아닐까? 남들 눈에 딱 내 모습도 그렇게 되어 가고 있겠지 하는 짐작이 서럽다. 바라는 것과 실상의 괴리감에 힘든 날을 지나가는 중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왜 이런 집단을 사랑한다고 귀하다고 했는지 종종 이해가 안 된다. 그 반대쪽 집단들이 가지기 쉬운 무자비함과 위선과 욕망과 별 다르지 않게 문제가 많다.

우울해진 심사로 아내에게 그랬다. "나 당신 죽는 날 나도 그냥 떠나고 싶어...미리 약 준비했다가ㅠ" 아내는 단호하게 그러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 생각하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었고 성인이 되면 자기 삶이 있는데 뭘... 속으로 그랬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며 세상을 지나가는 심정은 마치 재미없는 군대를 의무적으로 2년 복무하는 것과 닮았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거쳐야하는 병역의무. 싫다고 중간에 도망가거나 벗어나면 탈영병으로 호된 벌을 받는다. 그 군 생활을 무슨 재미있다고 박수치며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날이면 벽에 막힌 듯 답답해지는 심정이 그렇다.

- ‘나는 사흘마다 부활이 필요해...’

*************************************************************************



오후 - ‘좋은 약을 주기 위해 쓰라린 병을 먼저?’

오전에 그렇게 '사흘마다 부활이 필요해...' 라는 제목의 넉두리를 좀 썼다. 사소한, 그러나 누구에게는 사소함으로 그치지 않고 죽을 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상의 고통을 털어놓으며. 좀 더 수양이 된 성품이라면 삭히고 넘길 일이었지만 소인배라 속을 태우며 부글거리는 심정을 감당치 못하고.

그러고 나서 채 2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병실로 두개의 우편물이 배달되어 왔다. 하나는 멀리서 공부중인 딸이 보내온 생화 몇 송이 꽃 선물. 벌써 1년 가까이 보름마다 오는 정기적 선물이지만 이런 날 이 타이밍은 그 위로가 작은 다발이 아니다. 힘든 일 힘든 순간에는 자기를 생각하면서 기운 내라는 고마운 문자를 따로 보내온 딸. 조금 전 생긴 일은 알지도 못했을 텐데.

또 하나는 이름도 처음 듣는 분이 바다 건너 멀리 미국에서 보내온 책 한권이었다. 예전에 지척인 프랑스 떼제공동체까지 갔다가 눈앞에서 포기한 영국 브루더호프 신앙공동체. 그 영국 브루더호프는 아니지만 전 세계 4개중 하나인 미국 브루더호프에서 9년째 살고 계시다는 부부가 보내왔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려왔다. 삶에 치여 멀어지고 이젠 꿈조차 안 꾸는 처지인데 엽서에 쓴 글을 읽으면서 실락원을 향한 그리움 같은 것이 다시 올라와 목이 메인다. 나도 그러고 살고 싶었는데...

때를 맞춘 듯 배달 된 선물 두 곳 모두 아내와 나에게 힘내란다. 메시지도 그랬고 마음도 그랬고 결과도 그렇게 되었다. 참 신기하다. 아내와도 말을 주고받았지만 이런 일 처음 겪는 경험이 아니다. 마치 준비된 작은 기적처럼 고통의 해프닝 뒤에 바로 따라 오는 구체적 위로의 해프닝들, 나쁜 일이 생긴 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이 선물들은 이미 몇 달 전, 또 몇 주 전 준비되고 출발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을 주관하는 누군가의 의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의문이 든다. 병 주고 약 주는듯한 이 순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좋은 선물을 받으면서 건방을 떨거나 오만하지 못하게 하려는 걸까? 마치 좋은 약을 주기 위해 고통스런 먼저 병을 주는 듯 묘한 타이밍 앞에서 자주 당황한다. 큰 감사와 감격으로 삶의 주관자를 기억하게 하시는 걸까?

사실 나는 바라는 것 없다. 아니, 작다. 그저 나 스스로 땀 흘려 얻은 것만 먹고 제 앞가림이나 간신히 하면서 살게 하셔도 된다. 남 돕고 나누는 건 턱도 없겠지만 그냥 평범하게 살게 만 해주시면 감사하련만...

원망과 탄식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시려고, 몇 날씩이나 되새기며 사는 꼴은 더더욱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속을 알 수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그 분과 지금 동행하며 이 세상을 자나가고 있는 중이다. 사소한 일마다 울며 웃으며, 일어나는 해프닝마다 두려움에 떨며 감사하면서...

(2008.5.9. - 2017.4.19. 맑은고을 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