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우리는 무엇에 망가지는가, 협박인가? 유혹인가?
희망으로
2017. 4. 8. 15:38
<우리는 무엇에 망가지는가, 협박인가? 유혹인가?>
'간 질환 판정, 당뇨 관리요함'
건강검진에 3번, 6년째 수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고 구체적으로 커피와 밀가루음식을 줄이라고 경고가 나왔다. 이번에는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에 걸려 믹스커피는 3잔에서 1잔으로 줄였다가 그나마 몇 달은 아예 안마셨다. 좋아하던 빵도 밤에 먹던 라면도 거의 끊다시피.
하지만 4-5개월이 넘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먹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협박에 가까운 검진결과의 문구보다 입에 달라붙는 달콤함과 고소한 유혹이 훨씬 힘이 센가 보다. 이래서 암환자 중 상당수가 성공적인 수술과 완치에 가까운 회복이 되었다가도 재발에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생기나보다.
'매운 북풍한설도 못벗긴 외투를 봄바람이 벗게 한다' 이솝우화에도 나왔던가? 더운 날씨가 거센 바람보다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세더라는.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의 시절은 잘도 버티고 이겨낸 사람들이 잘 나가는 시절에 유혹을 못이겨 무너지거나, 악하고 냉정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다가 남과 자신의 생을 망치는 경우를 주위에서도 쉽게 본다. 역시 협박보다 유혹이 더 힘이 센걸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영화로 만든 '사일런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몇 번이나 성화를 발로 밟고 배교를 하여 살아난 신자가 있다. 그 괴로움과 두려움으로 도망 다니다 잡히고, 멀리가면 다시 고향이 그리워 돌아왔다가 또 잡히고. 그가 비난하는 동료 신자와 신부에게 절규하며 말한다.
"저는 왜 지금 태어난 건데요!
나도 신실한 기리스탄(그리스도인)으로 죽을 수 있었어요.
박해 없던 시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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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잘려 죽고, 십자가에 묶여 바닷물에 잠겨 죽고, 땅에 묻혀 목만 내놓고 버티다 죽고 불에 타죽고... 기독교를 따른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고문과 매질로 죽어나가던 시절, 그들은 눈앞의 죽음에 공포로 떨면서 천국을 향한 믿음도 놓지 못해 찬송을 부르며 죽어 갔다. 기껏 그림인 성화 하나 발로 밟으면 살려준다는데 그걸 안했다. 신부가 그런 신자들이 불쌍해서 그냥 밟아도 된다고 했더니 겨우 밟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압박자들이 십자가를 얼굴 앞에 대고 침 뱉어 보라고 강요한다. 차마 못한다. 그리고 끌려간다. 바닷가에 세워진 나무형틀에 사흘을 매달려 있다가 죽어 갔다. 그 공포 그 두려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그 악한 고문 앞에 촛불 같은 목숨, 평범한 신자 기치히로는 그 현장에서 살고 싶은 생명의 몸부림으로 배교를 하고 괴롭다. 박해 없는 시절이라면 얼마든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죽을 수 있는데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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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 시절에 목이 잘리는 죽음의 공포에도 노래 부르며 죽어간 이들이 대단한지, 살아남기 위해 배교하고도 두 번 세 번 고해를 하면서 용서를 받고 싶은 이가 대단한지. 그리고... 박해 없는 이 시절에 우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지. 양심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면 의문은 더 커진다.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지가.
‘협박이 더 무서울까?’
‘유혹이 더 무서울까?’
아담과 하와를 망친 것은 유혹이었다. 다윗을 망친 것도 전쟁이나 창칼이 아니고 밧세바를 통한 유혹이었고,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협박이 아니고 유혹..., 몸을 죽일 뿐인 위협보다 영혼까지 죽인 유혹이 정말 무섭다.
오늘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유혹과 싸우다 지친다. 배고픔과 추위와 패배감은 우리를 둘러싸고 유혹으로 더 빨리 떨어지라고 부채질 한다. 작은 위협과 고난들이 외로움과 슬픔으로 변하며 연기처럼 들어와 슬금슬금 나를 흔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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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없는 시대, 박해 없는 이 나라에 오늘 우리는 신실한 신자로 사는 중인가? 진짜? 한 점 부끄럼 없이? ㅠㅠ
'간 질환 판정, 당뇨 관리요함'
건강검진에 3번, 6년째 수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고 구체적으로 커피와 밀가루음식을 줄이라고 경고가 나왔다. 이번에는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에 걸려 믹스커피는 3잔에서 1잔으로 줄였다가 그나마 몇 달은 아예 안마셨다. 좋아하던 빵도 밤에 먹던 라면도 거의 끊다시피.
하지만 4-5개월이 넘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먹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협박에 가까운 검진결과의 문구보다 입에 달라붙는 달콤함과 고소한 유혹이 훨씬 힘이 센가 보다. 이래서 암환자 중 상당수가 성공적인 수술과 완치에 가까운 회복이 되었다가도 재발에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생기나보다.
'매운 북풍한설도 못벗긴 외투를 봄바람이 벗게 한다' 이솝우화에도 나왔던가? 더운 날씨가 거센 바람보다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세더라는.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의 시절은 잘도 버티고 이겨낸 사람들이 잘 나가는 시절에 유혹을 못이겨 무너지거나, 악하고 냉정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다가 남과 자신의 생을 망치는 경우를 주위에서도 쉽게 본다. 역시 협박보다 유혹이 더 힘이 센걸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영화로 만든 '사일런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몇 번이나 성화를 발로 밟고 배교를 하여 살아난 신자가 있다. 그 괴로움과 두려움으로 도망 다니다 잡히고, 멀리가면 다시 고향이 그리워 돌아왔다가 또 잡히고. 그가 비난하는 동료 신자와 신부에게 절규하며 말한다.
"저는 왜 지금 태어난 건데요!
나도 신실한 기리스탄(그리스도인)으로 죽을 수 있었어요.
박해 없던 시절엔!"
목 잘려 죽고, 십자가에 묶여 바닷물에 잠겨 죽고, 땅에 묻혀 목만 내놓고 버티다 죽고 불에 타죽고... 기독교를 따른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고문과 매질로 죽어나가던 시절, 그들은 눈앞의 죽음에 공포로 떨면서 천국을 향한 믿음도 놓지 못해 찬송을 부르며 죽어 갔다. 기껏 그림인 성화 하나 발로 밟으면 살려준다는데 그걸 안했다. 신부가 그런 신자들이 불쌍해서 그냥 밟아도 된다고 했더니 겨우 밟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압박자들이 십자가를 얼굴 앞에 대고 침 뱉어 보라고 강요한다. 차마 못한다. 그리고 끌려간다. 바닷가에 세워진 나무형틀에 사흘을 매달려 있다가 죽어 갔다. 그 공포 그 두려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그 악한 고문 앞에 촛불 같은 목숨, 평범한 신자 기치히로는 그 현장에서 살고 싶은 생명의 몸부림으로 배교를 하고 괴롭다. 박해 없는 시절이라면 얼마든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죽을 수 있는데 라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 시절에 목이 잘리는 죽음의 공포에도 노래 부르며 죽어간 이들이 대단한지, 살아남기 위해 배교하고도 두 번 세 번 고해를 하면서 용서를 받고 싶은 이가 대단한지. 그리고... 박해 없는 이 시절에 우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지. 양심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면 의문은 더 커진다.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지가.
‘협박이 더 무서울까?’
‘유혹이 더 무서울까?’
아담과 하와를 망친 것은 유혹이었다. 다윗을 망친 것도 전쟁이나 창칼이 아니고 밧세바를 통한 유혹이었고,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협박이 아니고 유혹..., 몸을 죽일 뿐인 위협보다 영혼까지 죽인 유혹이 정말 무섭다.
오늘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유혹과 싸우다 지친다. 배고픔과 추위와 패배감은 우리를 둘러싸고 유혹으로 더 빨리 떨어지라고 부채질 한다. 작은 위협과 고난들이 외로움과 슬픔으로 변하며 연기처럼 들어와 슬금슬금 나를 흔들고...
박해 없는 시대, 박해 없는 이 나라에 오늘 우리는 신실한 신자로 사는 중인가? 진짜? 한 점 부끄럼 없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