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일기 3211일 - '즐거움은 합치고 괴로운은 쪼개어서'
<간병일기 3211일 - ‘즐거움은 합치고 괴로움은 쪼개어서’>
‘톡톡!’
아내가 레이저지시봉을 길게 뽑아서 나를 두드렸다. 부스스... 나는 일어나 오랜 반복으로 습관이 된 몽유병자처럼 반쯤 제정신 없이도 익숙하게 뭔가를 시작한다. (‘레이저지시봉’ - 잠든 나를 소리로 불러 깨우기가 조심스럽고 힘들어 생각해낸 도구다. 아내의 머리맡에 두었다가 밤사이 두세 번 나를 깨울 때 요긴하게 쓴다.)
‘쓰윽, 부시럭 부시럭’
침대 아래의 프라스틱 바구니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펼친다. 멸균 장갑, 멸균 거즈, 식염수, 써지젤, 넬라톤카테터, 소변통, 비닐팩 깨끗한 티슈... 전에는 두어 가지 더 있었지만 줄인 것이 이 정도다. 여기에 밤이면 불을 켜서 남들에게 불편을 줄 수 없어 휴대용 랜턴까지 머리에 쓴다. 아내의 마비된 방광신경 때문에 인공도뇨로 소변을 볼 때마다 꺼내야하는 소모품들이다.
‘아, 잠 좀 길게 자고 싶다...'
정말 고단하고 깊이 잠든 새벽 2시 3시쯤에 일어날 때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늘어지는 몸이 감당이 안 되면 짜증도 난다. 햇수로는 10년 째, 만 9년 정도 이렇게 살아 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의미가 있지요’라는 노래가 있던가? 뭐 나도 그렇게 동의한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 닥쳐오는 것들은? 더구나 그것이 길고 지루한 경우도 의미 운운이 될가?
‘아...지겹다. 언제까지지?’
초기에는 하루에 6번 정도 하던 이 넬라톤 인공소변빼기가 방광이 점점 작아지면서 하루에 8번, 10번을 지나 어떤 날은 하루에 12번도 하게 된다. 12시에서 2시 점심시간 앞뒤로는 4번을 연달아 한다. 그럴 때면 커튼을 쳤다가 치웠다가 엉덩이를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사이 재활치료 없는 2시간의 휴식이 다 지나가버린다.
‘몇 번이 남은 걸까?’
나도 모르게 밀려오는 생각들이 무슨 죄가 있나, 당연히 그럴 수 있지. 몇 번, 혹은 앞으로 한 달이나 일 년 만 한다면 눈 딱 감고 해치울 수 있다. 노래까지는 안 불러도 무겁거나 슬프거나 그런 생각 떨쳐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기약이 없다. 1년 365일 곱하기 10은 3650번, 10년이면 36500번... 그런 숫자가 저절로 머리로 떠오르면 속된말로 환장하겠다. ‘언제까지?...’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살려줘요! 뽀빠이~ ...아니면 긴급처방을’
이럴 때면 빨리 긴급 조치를 해야 한다. 수렁은 처음 얕은 곳에서 미끄러질 때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허리까지 빠지고 가슴까지 빠지면... 슬픈 기분, 우울한 무력감, 좌절감이라는 수렁은 진흙수렁과 다를 바 없어서 방치하면 게임 끝! 회생불능이 되고 만다.
‘그래! 그때 참 행복했었어! 아들이 과 수석입학이라고 돈 생기던 날! 기능대회에서 금메달 땄다고 소식 오던 날, 딸과 함께 보냈던 제주도 사흘 여행은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앞으로도 이런 저런 좋은 소식은 계속 오겠지?’
그렇게 앞으로도 평생 올 기쁜 순간 행복할 날을 미리 합쳐서 입가에 미소를 만드는 것이다. 너무 많아서 바보가 되어 히죽거릴지 모를 고슴도치 부모의 희망! 그런 것 합치기. 반대로 괴롭고 지겨운 일들은 잘게 쪼개어야 한다.
‘지금, 한 번만 하고 다음은 다음에 닥치면 어떻게 되겠지 뭐, 다음 올 때까지 내가 반드시 살아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런 식의 나누기로. 비싼 물건이나 고액 전자제품들을 팔아치우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 할부로 계산해서 작아진 숫자로 유혹하는 것이다. 하루에 얼마, 커피 한 잔 값, 뭐 그렇게 나눠서 수십 만 원짜리 보약이나 물건도 팔아치우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정말 효력이 있다. 그 작은 숫자에 부담감 털고 홀랑 넘어가서 사버리게 된다는. 원숭이의 조삼모사를 놀리지만 사람도 별 다르지 않나보다.
‘이거...혹시 바보가 되는 거 아녀?’
어찌 보면 스스로 속이고 속아 넘어가는 엉터리 계산법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현명한 짓이다. 비관적으로 가라앉아 아직 오지도 않은 평생의 짐을 어깨에 올리다 자빠져 우는 것보다, 아직 오지도 않았지만 행복할 순간의 상상을 모아모아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무거운 짐을 가소롭게 메고 힘내서 통과한다는 것이.
‘아하! 기쁠 일 또 있네!’
수렁을 기어 나와 묻은 흙을 조금 털어내고 보니 생각이 났다. 오늘은 막내딸이 다니는 공부 빡센 과학기술원 17학번 신입생들 입학식 날이다. 그 오리엔테이션 축하공연에 딸은 선배가 되어 베이스를 어깨에 메고 연주하는 날이다. 꼭 한 해 전 이 날 축하를 받으며 입학하던 아이가 잘 견디고 적응해서 살아남았다는 보이지 않는 훈장이 반짝거리는 기쁨이 있다.
‘즐거움은 합치고 괴로움은 쪼개어서!’
삶은 그러는 사이 지나간다. 모두 뾰족한 별 방법이 있나? 그렇게 살다 가는 거지.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고, 오늘의 고통은 오늘로 충분하다." (마6:34, 쉬운성경)]
(2008.5.9. - 2017.2.22. 맑은고을 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