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간병일기 3194일 - '나는 소도를 거쳐 지성소에서 죽는다'
희망으로
2017. 2. 5. 13:40
< 간병일기 3194일 - ‘나는 소도를 거쳐 지성소에서 죽는다’> 창문을 열었다. 싸늘한 차가운 공기에 몸이 으스스해서 다시 창을 닫았다. 겨울에 지친 마음이 성급하게 봄을 기대했지만 아직 빨랐나보다. 겨울인생이 희망이라는 봄을 향해 성급하게 달려가다 좌절이라는 동상에 걸린다더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동방규라는 시인은 조국을 떠나는 왕소군의 슬픈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던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삶이 오래가고 있다. 설명절 연휴가 끝나고 하루가 채 가기 전 뉴스 하나가 마음을 꽁꽁 얼렸다. 뇌병변 장애와 간암을 앓는 형을 동생이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거동 못하는 형을 30년이나 간병하느라 결혼도 포기하며 기초수급자로 살던 동생. 결국 검찰도 구속을 포기하고 불구속입건으로 재판에 넘겼다. 법정에서 판결은 어떻게 나올까? 당장 돌보는 이 없는 형의 목숨도 달린 판결. 감옥을 보내도 안보내도 낭패다. 엄연한 법치국가에서 공평성도 지키고 인정도 살피자니. 그보다 그들에게 봄은 올 수 있을까? 법이 무슨 판결을 내리던 상관없이... 삼한시대에는 ‘소도’라는 것이 있었다. 죄를 지은 사람도 그곳으로 피하면 강제로 처벌하지 못했다. 본래 천군이 제사를 지내는 그 장소는 세상의 몰매에서 구해주는 곳이 되었다. 그 정신이 작동된 것일까? 독재시대의 수배자들도 명동성당이나 조계사로 피했었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도망자의 처지에서 어느 정도 보호받았다. 완벽하지도 오래 가지도 못했지만. 간병의 긴 고통과 우울증으로 형을 찌른 동생도 그곳으로 피할 수 없을까? 그래서 세상의 벼랑에서 길이 생기고 살아남았으면... 소도가 넓은 땅이거나 마을의 규모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소도임을 표시하는 솟대가 달랑 세워진 작은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 소도에 솟대대신 십자가가 달리면 교회가 되고 불상이 앉으면 절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나 절을 찾아 몰리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옛날의 그 소도도 도둑질하고 도망와도 잡혀가지 않아 도적이 우글거리는 소굴이 되기도 했단다. 죄수복 입지 않는 죄인이 모이는 교도소가 교회라고 누군가 우스개 하더니 닮았다. 설명절에 왔던 딸아이를 기차에 태워 학교로 보내고 잠시 마음이 허전했다. 예전에는 아주 큰 씽크홀 같은 구멍이 났는데 이제는 들판을 쓸고 가는 바람 한 무리 정도로 작아졌다. 아내가 중환자이던 초기시절 너무 힘들었다. 그 시절에 죽지 않고 생명만이라도 이어가게 붙드는 큰 동기가 딸이었다. 어린 딸을 보호해야한다는 부모의 의무 때문에. 그때 한 달에 하루 아이를 만나고 돌려보내면 사흘 나흘을 몸살을 앓았다. 나의 소도가 되어 힘주던 딸이 사라져버린 심정이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건물의 형태만이 아닌 또 다른 소도가 분명히 존재한다. 때론 비굴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이어가게 해주는 명분 같은 기능으로 작동하는 소도. 그 대상이 가족이기도하고 종교이기도 하고 명예나 재산, 혹은 취미가 될 수도 있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갈 때 아주 작은 불빛 하나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가! 바로 그런 역할로 비참하고 지치는 세상살이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충분히 소도가 된다. 그런데... 소도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끝일까? 그렇지 않다. 교회로 몰려가는 그 많은 사람들도 건강한 생을 마치지 못하고 자살로 주저앉는 소식들이 그렇다. 세상 어떤 심판이나 평가로부터는 울타리가 되고 피난처가 되어주었음에도 완벽히 막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바깥의 모든 구속은 뿌리쳐도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구속, 바로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불안 두려움 욕망의 굴레로 인한 고통 등... 그래서 더 신성하고 격리된 곳이 있으니 바로 성소 안에서도 더 깊은 곳, 바로 지성소다. 세상 누구도 동행해서 들어갈 수 없고 세상 어떤 방패도 들고 가지 못하는 장소, 그래서 그 모든 것이 힘이 되지 못하기에 위험도 되지 못한다. 신과 나만이 만나는 최후의 장소다. 구약의 시대에는 제사장만이 일 년에 딱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어기는 사람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물건과 모든 장소가 무기력해질 때, 그런 순간에도 변함없이 내 생명을 지켜주는 곳이 바로 지성소다. 하지만 제사장으로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사람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맙게도 길이 열렸다. 예수는 그 자격과 제한을 자기 생명을 대가로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지성소의 휘장을 찢음으로.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그 지성소를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을 종종 만난다. 죽을 것 같은 순간. 수칙이 있는데 그 지성소에서는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주인 행세를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지성소는 내가 죽는 곳, 내 무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지성소가 평안을 안겨주고 다시 살아나는 곳이 된다. 내게 지성소는 하나님이며 다음 생이다. 프레드릭 페이버(Frederick Faber)는 이렇게 설교했다. - 에이든 토져 / 하나님을 추구함 "단지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 생각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숨 쉬는 것, 이보다 더 높은 축복은 세상에 없네. 예수님의 아버지, 사랑의 상급이여!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그의 보좌 앞에 엎드려 그를 보고 또 보는 것은!" "주여, 당신의 길은 얼마나 훌륭하고 인간의 길은 얼마나 굽고 어두운지요.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다시 일어나도록 죽는 법을 보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성전의 휘장을 찢으셨듯이 우리의 자기 생명이라는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 주십시오. 우리는 믿음의 완전한 확신으로 가까이 가렵니다. 우리가 주님의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거하게 될 때에 그 영광에 익숙할 수 있도록 이 세상 이 곳에서 당신과 함께 거하는 것을 매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그네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이 성소가 되신다. [에스겔 11장16절.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