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일기 3185일 - '일상이라는 기적'
<간병일기 3185일 - '일상이라는 기적'>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그렇다. 참 맞는 말이다.
아무리 걱정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게 걱정이고
아무리 걱정을 안 해도 더 커지지 않는 게 또 걱정이다.
문제는...그런 줄 알아도 생기고 안하려고해도 생기는게 걱정이다.
'한국사전의료의향서보관은행'이라는 곳이 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을 것과 원하는 장례의 내용을 미리 기록하고
그것을 서류로 등록하여 전국 병원이 열람할수있게 제공한단다.
그래서 미리쓰는 유서도 겸하여 작성해보았다.
이미 장기기증은 아내와 나, 둘째아들까지 등록되어있다.
그런데...참 복잡한 느낌 하나가 따라왔다.
이 고단한 세상을 모두 졸업하는 그날이 한편 기쁘게 기다려지는데
한쪽 마음에서는 생각도 못한 슬픔이 폭폭 솟고 웅크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좋아하는 여러가지와 이별한다는 슬픔
그 서로 다른 두 감정이 동시에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러고보니 걱정과 슬픔, 이 두가지는 평생 나를 떠난 적 없었다.
눈을 뜨는 아침부터 밤까지, 심지어 꿈속까지 따라오기도 했다.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고요히 평안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걱정과 슬픔, 악한 생각과 연약한 자기연민이 종일 덮쳐온다.
힘을 다해 감사와 기쁨 열정 등으로 밀어내고 밀어내며 살뿐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웅크린 본성처럼 우리를 덮치고 우울하게 한다.
마음은 언제나 밝은 햇살아래 꽃동산을 뛰어다니며 살고 싶은데
몸으로 사는 이 세상은 천둥과 그늘, 비와 바람이 쉬지않고 흔든다.
새벽에 일어났다가 다시 잠에 들지 못하는 날들이 자꾸 많아진다.
아이들 건강과 취업과 진학 등 여러가지가 나를 걱정하게 하고
아내와 나의 남은 날이나 형편이 나빠질 경우가 점점 선명해지고
먼 서쪽하늘 손톱만하던 먹구름이 점점 크게 다가오며 나를 흔든다
그나마 웃음짓던 큰소리와 힘주던 어깨를 무안하게 주저앉힌다.
언제는 뭐 다른 날 아니었는데 새삼스럽게...
새벽부터 애꿎은 찬송만 반복으로 듣고 또 들으며 심리전 혹독하게 치른다
밀고 당기는 한 판, 기도가 되었다가 한숨이 되었다 변화무쌍으로.
안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씩씩하고 여유넘치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가까이 오고싶은 기운 불뚝나는 말만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은 원이로대 영혼이 밀려나는 순간들이 참 야속하다.
힘겨워 주저앉으면 다시 걱정이 되고 슬픔이 되는 악순환이 된다.
"왜 술을 먹어요?"
"부끄러워서, 그걸 잊으려고"
"뭐가 부끄러운데요?"
"술먹는게..."
마치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의 변명처럼 물고 물면서...
누명을 쓰고 십여년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다 진실이 밝혀져
석방된 분노의 사람이 친구를 찾으러 다녔다
원수도 아니고 모르는 남도 아닌 친구가
있는 알리바이를 거짓증언을 해서 죄를 덮어썼기에.
왜 그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더 괴로웠다
정작 거짓증언으로 그 친구 자신에게 아무 소득도 없었고
그럴만한 원인도 없었는데 그랬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친구가 살면서 지나간 십여년 경로를 추적을 하면서
같이 지낸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이유를 알게된다.
혹독한 폭력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버틴 그가
자기를 부러워하며 따라다니다가 차이를 소화못해 좌절했다는 것
그리고 내려지는 결론에 섬뜩하리만치 몸서리가 쳐졌다.
사람은 분노나 욕심으로 가득차서 행동하는 어떤 경우보다
아무 의욕도 희망도 없이 영혼이 비어버린 채 하는 경우가
훨씬 끔찍하고 예상 못할 행동을 하게 된다는 걸.
많은 이들이 살면서 종종 그런 억울함과 막막한 상황에 빠진다
누구 하나가 원인의 전부도 아니고 결과의 전부도 아님에도
악연이 되거나 우환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망연자실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슬픔도 고통도 분노도 한방에 털어낼 방법은 없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는 그런 기적이 없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다
단지 바닷가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한 번에 한줌 정도씩 덜어내며
수천번 수만번에 걸쳐 씻겨질 뿐이다
빗물에 조금씩 닳아가는 바위의 모서리 처럼
하루 하루라는 삶의 겹겹에 녹아지고 덜어지고 용서되고,
그렇게 불행들이 줄어드는 것 뿐이다.
단지 그 많은 반복들이 주어지는 것이 기적이고 사랑이다
그러고보면 일상이 신의 축복이다
긴 일상이 인간의 희망이다.
(2008.5.9 - 2017.1.27 맑은고을 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