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일기 3173일 - '드릴 게 이것밖에 없습니다'
<간병일기 3173일 - ‘드릴 게 이것밖에 없습니다’>
독감에 열흘 넘게 시달리면서 많은 일을 미루었다.
중간에 장거리 병원 진료까지 다녀오느라 시간이 더 없었다.
아내 목욕도 밀렸다가 간신히 씻겨주고 나니 빨래가 수북 쌓였다.
지난 주 밀어놓은 것 까지 합쳐지니 가방이 두 배가 되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부득이 메고 들고 병원을 나섰다.
차갑다. 매섭다고 해야 하나.
아직 떨어지지 않은 기침들이 목 어딘가에 숨었다가 연달아 나온다.
건널목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포장수레 하나에서 불빛이 보인다.
이 추운 날에도 장사를 나오신 어묵과 붕어빵 파시는 아주머니
한파 때문인지 손님 하나 없이 멍하니 혼자 앉아 계신다.
‘하나님, 저 집 남은 거 다팔아주세요.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얼굴 마주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게 해주세요‘
시 한편이 떠오른다.
겨울밤의 추운 느낌 때문에 종종 읽어 보던 시.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 이해인 시 '겨울 길을 간다' 중 일부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라는 제목의 연극이 있다.
"에이, 사람이 어떻게 날씨에 따라 변해!"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독감을 열흘쯤 달고 살면서 불안해졌다.
'그럴 수도...'
아픈 몸에 시달리다보니 고상한 표정과 따뜻한 배려는 저만치 밀어내고
그 자리를 조금씩 짜증과 회색 비관들이 차지하기 시작하더라
'십년 공부 나무아미 타불'이라더니... 초라한 수행이 부끄럽게도.
어제는 한밤중에 깼다.
옥상 구석 토끼장만한 작은 방
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적막감과 서늘함이
가슴팍으로 휙! 덮쳐온다.
외로움은 독을 풀은 공기처럼 폐로 들어온다.
산소가 지독히 부족한 동굴 속에 갇힌 듯 질식할 것 같았다.
꿈이었다.
요 근래 여러 버전으로 바뀌어가면서 홀로 숨 막히는 꿈이 자주 나타난다.
다시 잠들기 두렵게 하는 토막 꿈들...
겨울 한 밤중에 별빛도 없는 하늘아래 서성이는 사람처럼 서러웠다.
가난만이 긴 인생길에 지겹게도 절친이라며 따라붙고
마음과 몸이 누가 먼저 무너지나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쁜 놈들...
‘봄은 언제 오려나?’
그러다 문득 미안함이 해일처럼 덮쳐 왔다.
‘내가 돈을 벌려고 이 추운 날에 한데서 고생을 했던가?’
‘이날까지 단 한 번이라도 병에서 회복 못한 적이 있었던가?
그랬다면...아마도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다.
아파 죽지도 않았고, 밥이 떨어져서 굶어 죽지도 않았다.
‘나보다 몇 배는 더 긴 시간을 더 혹한 속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보다 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버티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그리 마음약해지고 나를 돕던 분들 기운 빠지게 슬퍼했던가...
한 시간 분초도 눈을 떼지 않고 이날 이 자리까지 망하지 않게 끌어와 준 분.
그렇게 완벽하게 돌보느라 고단하실 하나님께 많이, 많이 죄송해진다.
반대로 나는 아무 것도 드리지도 못했고 드릴 것도 하나 없는 주제인데.
큰 물질로도 못 드리고, 큰 빛날 일로도 못 갚았다.
가난뱅이에 변덕쟁이에 불평만 달고 살면서 속상한 답례만 했었네.
그래서...,
이 몸으로 갚을 기회를 주시는 걸까?
눈앞에 닥친 어떤 삶에도 몸으로 버티고 살면서 그걸로 라도 빚 갚으라고?
내 것처럼 치장하고 내 이름 반짝거리는 칭찬을 받기위해 살지 말라 시는 걸까?
꿈도 접게 하시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가고 싶은 것도 포기하게 하시고...
“하나님,
그렇게라도 살게 해주세요.
그렇게 몸으로라도 때우게 해주세요.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면 하나님의 발아래에서 떠나지 않을게요.
종종은 멈출 수 없는 눈물도 흘리겠습니다.
때론 감사해서, 때론 힘들어서.
그것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대고 도움을 바라며 산다는 제 고백입니다.“
(2008.5.9. - 2017.1.15. 맑은고을 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