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간병일기 3300일 -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희망으로 2016. 12. 15. 11:38

<간병일기 3300-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들은 말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어려움에 힘들어하는 이에게 옆 사람이 위로를 하면서 한 말입니다. 마음에 계속 이 말이 남아 오래도록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 세상에 아무리 비가 많이 오는 곳이라도 그치지 않고 오는 법은 없지. 세상이 망한 노아의 방주 때 비도 그쳤는데...’

 

 

- 자정이면 들통 나는 슬픈 신데렐라

 

'! !...' 열 두 번의 소리가 울리고, 자정이 되면 정체가 드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려한 무도회와 아름답게 치장한 옷도 장신구도 초라하게 바뀝니다. 신데렐라가 그렇고 자정은 그렇게 들통 나는 시간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신데렐라와 비슷한 처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남들과 같은 사람인줄 알고 신나게 지내다가 아닌걸 알게 되는 슬픈 자화상. 시인 윤동주의 육첩방만 남의 나라가 아니고 지금 세상이 제게는 온통 남의 나라 같이 느껴졌습니다바쁘게 돌아가는 낮에는 내 처지를 잊고 그럭저럭 때우며 지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들 속에서 떠들고 때를 따라 먹고, 치료실 일정을 따라가면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거나 무시당하지 않고 살고 싶어 잘난 척도 하면서.

 

하지만 모두가 자기처소로 돌아가고 잠잠해지는 밤이 오면 온전히 자신의 숨소리만 들으면서 은근히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합니다. 마치 잠시 주어진 신분이 끝나고 본래의 처지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처럼. 온 몸과 시간, 자유가 꽁꽁 묶인 중증환자인 아내의 남편인 본래의 처지로.

그리곤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생각에 잠깁니다. ‘왜 살아야하지? 무엇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하고?...’

 

 

- 성공 없이는 살아도 꿈도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람들은 대개 바라는 무엇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상관없이. 그 재미도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공 없이는 살아도 꿈도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최소한의 자격기준이 있습니다. 적어도 자기 몸은 자기가 움직이거나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손톱만한 꿈이라도 세우고 기다리는 재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 형편이 안 되면 꿈이란 그냥 위로를 위한 생각과 말로만 존재합니다.

 

모두들 행복을 추구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세상 속에 신데렐라로 사는 나, 남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유익한 생명인줄 알았다가 아닌 걸 깨닫는 시간, 점점 자정이 싫어집니다. ㅠㅠ

 

 

- 힘들게 다시 얻어낸 일상의 삶

 

위의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는 말이 나온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은 정말 깊이 사랑하고 서로 원해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둘만의 사랑 속에서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납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는 남편, 엄마와 직장인의 두 몫을 감당해내는 아내는 조금씩 이전에는 없던 상황에 몰리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남자는 더 많은 시간들을 일에 끌려 다니게 되고, 일하는 여성이면서도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손색없도록 죽을힘을 다하던 아내. 둘은 모두 자기의 사랑은 변함없다는 주장을 하지만 틈이 생기고 맙니다. 낚시꾼들이 이미 잡은 고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듯 이미 얻은 일상은 조심스럽고 정성들여 간직하려고 하지 않는 게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결국 쌓인 피로와 무심함으로 사고가 나고, 뒤늦게 되돌아보고 너무도 귀중한 것들을 소홀이 여겼던 자세를 후회합니다. 자책하고 반성하지만 늦어버린 실수는 돌이키기 힘들어 상처만 남기고 이혼합니다. 잃고 나서야 소중한 줄 아는 것들이 어디 부부사이만이겠습니까? 건강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수시로 흘려보낸 시간들도 그렇습니다.

 

결혼 8년 만에 이혼하게 된 후 1년여를 따로 보내면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소중함과 빈자리를 절절히 깨닫습니다. 그리고 후배의 결혼식에 축하하러가서 남편이 축사를 해주다 펑펑 웁니다. 자기는 좋은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과, 너무도 소중했던 아내와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을 고백합니다. 주위의 권유로 용기를 낸 남자와 여자는 다시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아침식탁에 3식구가 마주 앉습니다. 결혼 생활 8년 동안 그렇게 많았던 아침식탁, 그 상황 그 순간과 똑같이. 그러나 이전과 같지 않고 다른 것 하나, 남자의 마음 속 감사입니다. 다시 찾은 소중한 일상의 삶은 겉모습이 같지만 속은 그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 가장 소중한 것은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삶

 

삶의 고백도 그렇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바라는 소원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그 삶이 귀한 줄을 몰라서 불평과 소홀히 대하여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상실할 위험에 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음을 압니다. 아마 미리 알았다면 열이면 열 아무도 그렇게 살지도 않았고 소홀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얻어낸 일상의 삶은 겉은 같아보여도 속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한 날들만 바라며 아무 일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던 이전과 달라질 것입니다. 믿음과 감사가 없던 평범한 날들이 믿음과 감사가 있는 평범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둘의 차이는 아마도 하늘과 땅만큼 멀고 다를 것입니다.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이 전과 같지 않더라.’

 

이 말은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유흥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옵니다. 몇 백만 부의 베스트셀러가 된 그 책에서도 이 구절은 너무도 유명한 말입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문에서 딱딱하고 재미없는 인문학 책으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는지 고백하고 있는데, 자신은 우리 문화재를 정말로 사랑했고, 그리고 그런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옮긴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문은 조선 정조 때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의 화첩석농화원에 발문으로 써준 글로 내용은 이렇습니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 그저 모으는 것은 아니라네


이 해석을 유흥준교수는 우리가 많이 익숙히 들은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이 전과 같지 않더라.’ 이 해석을 어떤 한학자들은 미술전문가가 공부가 모자라서 한학을 엉터리로 해석했다는 등 비난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새롭고 쉽게 이해하도록 해석한 것일 뿐이고, 의미가 크게 다르지도 않다고 봅니다.

 

알면 사랑하게 되는 것이나, 사랑하면 알게 되는 것이나 순서가 없고 다름이 없습니다. 어미의 자식에 대한 관계가 그렇고 부부의 서로에 대한 진전이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문하며 빗나간 불행을 부르는지 종종 봅니다. 사랑이 지극한 엄마는 못 배운 학력일지라도 아기에게 최상의 보살핌을 해주는 지혜를 볼 때마다 감탄을 하기도 합니다.

 

 

- "일하는 방법만 알고 일하는 의미는 모르면 그게 의사냐?"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우연히 이 부분의 대사를 듣고 참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세상에는 방법만 알고 의미를 잃은 많은 기술자들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술자를 비하하는 말이 아니고 사람을 고치는 의사나 약자를 보호해야하는 법을 집행하는 판검사들, 백지상태의 순수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 영혼을 깨끗하게 인도해야하는 종교 인도자들이 때때로 의미가 사라진 고급 기술자로 전락한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돈이나 명예욕심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슬픔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네 평신도의 신앙심도 다르지 않아야한다고 스스로 돌아봅니다. 성경을 많이 외우고 기도를 유창하게 하거나 찬양을 잘하는 등 어쩌면 참마음이라는 의미가 빠지면 신앙기술자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안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 둘이 하나가 되어야 진짜 비가 그칠지도 모른다는 묵상에 잠겨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웃비야 언젠가는 걷어지겠지만 우리 삶에 내리는 고통과 욕심으로 인한 불행의 비는 그냥 그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냥 알지 않고 사랑으로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또 사랑한다면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헤매게 되는 그 고통 말입니다.

 

- 너무 그리우면 들린다.

 

"아빠..."

 

딸아이가 나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병실 안은 깜깜하고 아이는 안 보였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10,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꿈을 꾼 걸까?' 그러나 너무 생생하게 남은 아이의 목소리가 맘에 걸렸습니다. 엎치락뒤치락 쉬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더 보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별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내가 요즘 아이 때문에 많이 마음이 쓰이더니 아마도 예민해졌나보다.’

 

많이 생각하면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그런데 왜 하나님의 목소리는 안 들리는 걸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몇 년을 묻고 하소연하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음성은 한 번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란 육신의 자녀를 향한 깊이보다 절실하지 못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지구 돌아가는 소리처럼 너무 큰 소리는 안 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귀는 작은 소리만 들려서일까요?

 

더 알고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 비가 그치도록,

그리고, 듣고, 보고, 손도 잡아보고 싶습니다. 주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