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배신'이 '신들의 세상'을 만났을 때
가일아빠 이응도 목사님의 글, -
몇 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실 겁니다. 아마추어들이 가수가 되기 위해서 경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 가수들이... 그것도 노래 잘하기로 유명한 가수들이 나와서 경연을 하고 한 사람을 탈락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경쟁을 통한 시너지효과가 있어서 가수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정말 이렇게 노래를 잘 할 수 있을까... 놀라면서 감동하면서 시청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들의 노래와 함께 제가 주목한 한 현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때 이후로 한국의 방송에서 사용하는 표현에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방송국이 그 프로그램을 선전하면서 자주 사용했던 멘트가 있습니다. 바로 ‘신의 음성’ ‘신의 목소리’ ‘신들의 무대’라는 표현들입니다. 무슨 뜻 일까요? 예, 마치 노래의 신이 강림해서 노래하는 것처럼 정말 기가 막히게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무대를 꾸민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전후로 여배우들이 좀 예쁘면 ‘여신’이라고 불렀고, 대학가에서 좀 예쁘면 ‘홍대 여신’, ‘공대 여신’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능을 잘하면 예능의 신, 음악을 잘하면 음악의 신, 공부를 잘해서 공부의 신, 투자를 잘하면 투자의 신, 축구를 잘하면 축구의 신, 김성근 감독은 ‘야신’으로 불렸고, 개그맨 유재석은 ‘유느님’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재미있자고 붙인 별명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경쟁에서 이기기를 원합니다. 더 뛰어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극한 소수가 승리하고 대부분의 다수가 패배합니다. 승리하는 소수와 패배하는 다수 사이의 경계가 너무 멀어져 버렸고, 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이 있습니다. 부럽고 탐나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어떤 경지.... 나도 성큼 한걸음 올라서고 싶지만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 대중들은 그것을 ‘신의 지경’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누리고 싶지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즐기는 바로 그 사람들을 ‘신(神)’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단순한 말장난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문화는 우리들의 의식의 반영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좌절하는지가 정확하게 대중문화로 표현됩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에 주목합니다. 신처럼 잘하고 싶고 신처럼 많이 가지고 싶고 신처럼 높아지고 싶은 소원이 판을 치는 세상, 그렇게 하지 못해서 늘 갈급하고 그렇게 하고 싶어서 늘 욕망하는 세상, 욕망하는 신들의 세상 –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교회와 성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히려 세상에게 참 신이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을 보여주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7장 1절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 7:1)
40년 전, 모세가 40의 청년일 때 동족 히브리인들을 위해 일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목자로 40년을 지낸 후 나이 80의 노인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바로 앞에서 신이 되게 하겠다!” 왜 하나님은 나이 40의 능력자 모세가 아닌 나이 80의 노인 모세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실까요?
모세의 삶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을 보여주는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는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뜻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 모습을 보이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거짓된 신들의 세상에 있는 교회의 거룩한 사명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참되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영광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인도하심을 사모합니다.
필라에서 가일 아빠
이 글을 읽으면서 계속 따라붙는 생각 하나를 떨치지 못해 여러 번 읽었습니다. 요 며칠간 숙제처럼 끙끙거리며 생각하고 정리하다가 밀어버리고, 다시 또 들여다보는 대상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글 아래 댓글로 달아볼까 하다가 글이 너무 길어져서 포기하고 따로 올립니다. 아마 목사님은 그냥 냅두실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분들에게 욕을 좀 먹을 것 같다는 예상이 들었지요. 흐흐,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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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전에 자면 사치지요...”
“손가락이 다 벗겨지고 필기할 힘이 없어 고무줄을 감고 손목으로 글씨를 쓰기도 하고요.”
“시험기간에는 엄마 몰래 카페인 음료를 하루에 5-6개씩이나 먹으며 잠을 쫓아요!”
이게 중학교3학년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익산 모 중학교3학년 여자아이로 전교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는데도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답니다. 가야할 고등학교가 자사고로 유명한 ‘상산고’라서... 쉬는 시간에도 고등학교과정 수학과 영어를 공부하느라 쉴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아이는 죽어라고 그 학교를 가야하는 걸까요? 그런데 그 학교 자체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상산고 졸업하면 거의 서울대를 갈 수 있으니까요. 서울 수도권쪽에서 내려오는 아이들은 고등학교 과정을 한 번, 어떤 아이들은 두 번을 끝내고 입학해요. 그러니 지방에서 1등해도 거기서는 꼴찌에 가까우니 늦은 만큼 더 해야지 안 그럼 더 벌어지잖아요.”
어쩌다 이제 중학교3학년이 이렇게 길게 쉴 틈 없이 달려야만 하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을까요? 더 놀라운 것은 중3은 이미 늦은 타이밍이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준비를 하고 달려야 한다는 이어지는 방송내용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의 8%는 이미 초등학생일 때부터 고등학교 과정을 배웠다는 통계를 내놓습니다. 그러니 입이 다물어집니다.
서울 강남쪽 아이들이 초등학생때부터 5개는 기본이고 7-8개씩 학원을 다니는 자료가 나옵니다. ‘공부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공부도 공평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공평하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미리 출발하고, 심지어는 엔진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결국 그 아이는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말았습니다.
[나는 절박했다.
나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내 집안 형편이 미워졌다.
(후반 생략) .]
한 해 1000만원씩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그 자사고를 지원한 것은 의대를 가는 가장 높은 결과 때문이었지요. 붙어도 떨어져도 걱정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친구들도 땅값이 비싼 곳일수록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는 걸 알아요. 라고... 그리고 지방도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기는 죽도록 노력해서 지역의 격차를 따라 잡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참 미안하고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 평범한 가정의 아이도 저렇게 힘들다는데 나는 딸아이를 지방도시도 아니고 산 밑의 읍면소재지에서, 그것도 돌봐줄 수도 없이 떨어져서 혼자 살게 했습니다. 좋은 고등학교 준비는 고사하고 중학교를 사고 없이 무사히 졸업하도록 돕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놓고도 정말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넘기고 준비하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학교를 입학하는 기쁨만 누렸습니다. 참 염치없게도...)
위의 일기를 쓴 아이는 결국 상산고를 합격해서 자사고로 진학했습니다. 잘 따라가면 또 서울대를 가고 목적지인 의사가 되겠지요. 한 편 그 고단하고 비장하며 어딘가 잃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건강이 염려로 무겁게 남습니다. 부디 건강하고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부심이나 우월감으로 채워지는 보상감정이 아닌 느긋한 평안, 따스한 감사 그런 것으로 말입니다.
위의 내용들은 지난 5월 16일부터 EBS에서 3일간 방송된 다큐프라임에서 나온 장면들입니다.
제목이 ‘공부의 배신’이고 3일 동안 각각의 소제목이 붙었습니다.
첫날은 1부 -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
둘째 날은 2부 -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마지막 날 3부 - 꿈의 자격, 그랬습니다.
내용은 한국 교육계에 일그러지고 지독할 정도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청춘 때려잡는 진학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명문대학을 가기 위해 부모부터 잘 만나야만 가능해지는 구조, 죽기 살기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간신히 그 명문대를 가서도 존재하는 또 다른 영구적인 계급의식, 차별 등...
비참한 느낌이 내내 무겁게 흐르는 현실 지적 방송물이었습니다.
이 3부작 중 두 번째, 2부 -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편에 우리 딸아이가 진학한 학교가 잠시 나옵니다. 사실 다른 종합일류대학에 더 심한 현상들이 있는데도 상대적으로 별로 심하지도 않고 비교적 학생들끼리 잘 지내는 아이 대학에서 그 증언 인터뷰를 찍었다고, 학생들이 학교 대나무숲(일종의 학교별 익명게시판)에 항의성 반발을 해서 저도 찾아서 보게 되었습니다.
(딸아이 학교는 원천적으로 소수의 이공계 특성화대학이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편이라 얼굴도 자주보고 서로 아주 가까워서 차별하고 그러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또 사회적배려자 전형이나 기회균등 전형으로 지원해도 되는데 아이는 일부러 일반전형을 고집해서 합격을 했습니다. 어떤 전형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것은 더 마음이 놓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부모의 한계일까요? 사배자, 지역균형으로 접수한 서울대나 지방 의대가 합격되지 않은 것이 정말 고맙게 와 닿는 것은 방송의 내용이 심각하게 느껴져서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의 고집 덕을 봅니다.)
문제는 이 3부 전체를 흐르고 있는 중심 키워드가 상류층, 일류, 계급 신분입니다. 그런 정상을 향한 비틀린 사회, 가정, 학생들, 교육계에 존재하는 단어는 ‘차별‘입니다. 나와 너, 우리와 너네들이 다르다. 그 다른 자리, 다른 세계라는 차별된 시각이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신‘과 비슷한 의미를 말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부터 벌써 생기는 부모의 능력 차이가 공부만이 아니라 꿈까지도 다르게 꾸게 하고, 설사 개인적 바람과 노력으로 발버둥쳐서 빠져나가려고 한들 너무나 두텁고 높고 완벽한 신분계층의 장벽 앞에 좌절합니다. 속수무책 인생이 되는 사례가 흔한 정도를 넘어 통계가 되고 세습하는 운명에 가깝게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방송은 밝혀냅니다. 예전 20-30년 전 부모나 당시를 산 우리들이 낭만처럼 아름답게 생각하는 노력, 극복, 설마?... 그런 말도 무색하게 만듭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목사님의 글에서 언급하고 본보기로 제시하신 모세의 경우가 정말 귀하고 한편 와 닿습니다.
[모세의 삶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을 보여주는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는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뜻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 모습을 보이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바로 위 내용들입니다. 그런데...세상의 신앙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정반대로 흐르는 거대한 강물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고 힘겨운 자리를 지키자고 하셨지요?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는...
제가 위에 말한 다큐를 보면서 무거워지고 마음이 추워지는 것은 신자들이 그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흐름에 앞장을 서서 끌고 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우려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러더군요. 몇 십 년을 새벽기도회를 이끌면서 돌아보니 신자들의 기도 내용을 크게 묶어보면 ‘신 없이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대부분이라 가슴이 아프다고.
“하나님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재산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명예도 주시고, 전쟁도 없고 사고도 없고 행여 실수로라도 망하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살게 해주세요!” 뭐 그런...
신 없이 신처럼 만이 아니라 아예 여기 이 땅도 지금 천국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도 있고요.
신이 없어도 될 만큼 갖추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은, 신의 자리에서 살게 해달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위의 다큐에서도 줄기차게 초중고를 관통하며 가정과 사회를 짖누르는 단어가 스펙, 뛰어난 능력(재산이나 신분, 재능을 포함해서) 인데, 어디선가 그 개념을 비슷한 느낌으로 많이 들었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바로 교회 안이었습니다. ‘복’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믿음생활을 잘한 대가’라는 논리로.
흔히 정치와 종교, 두 분야에 대해서는 친구나 이웃은 물론이고 가족 간에도 논쟁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두 분야의 이론이나 의지라는 것이 쉽게 물러나거나 수용이 안 되어 사이가 벌어지고 심지어 원수가 되고 집단과 집단, 국가 간에는 전쟁까지도 서슴치 않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그 분야는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펴고 사람들을 외치도록 강렬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나 신앙의 이름으로, 혹 그 내용이나 타이틀을 걸고 출세의 길을 집단으로 가도록 하는 성공담이 교회 안을 휩쓸기도 합니다. 축복을 받았다는 과정을 거쳐 ‘돈의 제왕’, ‘하버드명문 합격의 간증’ 등 형식으로, 그래서 신앙의 강렬한 어떤 의지를 그 성공에 융합(?)하는 대입기관들도 생겨납니다. 기독교 대입고시원, 성경에 바탕한 SKY가는 공부비법, 어떤 점에서는 앞 부분의 가치와 뒷부분의 성공을 하나의 이론에 담는 모순이면서도 괴기함에 이르기도 합니다.
딸아이가 지난해 수능시험을 보러간 미션계 여자고등학교 강당에 길게 걸린 ‘대학수능합격을 위한 ㅇㅇ일 작정기도회’ 현수막을 보고 참 씁쓸했었습니다. 지독한 스펙 쌓기 일정들, 밤낮 없는 과외, 정보를 위한 비용투자들, 그 첨단에 개신교의 거센 믿음과 성공 열정이 한 단어처럼 동의어가 되어 날뛰는 모습이 너무 흔해진 세상이 보기 좋지만은 않습니다.
‘사업이나 정계진출을 위해 대형교회로 옮겨 신앙생활을 하는 게 유리하다’...정도는 이제 교인세계에서는 애교 수준이거나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법칙정도로 수용이 되어버렸지요. 안타깝지만. 그러니 어떻게 보면 한 발이나 열 걸음쯤 더 나간 여러 슬로건이나 종교논리들이 뭐 별 대수도 아니지만요.
위 다큐를 보고 또 보면서 정작 청춘을 혹사당하고, 그 정도 끝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상처를 안고 평생을 허덕이며 실질적인 현실 삶으로 살 아이들에게 참 미안해지더군요. 그것도 대를 물려가며 어렵게 살아야한다는 불길한 예감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세상을 다음 세대들에게 안겨주는 어른이 되었을까? 더나가 모세 같은 돌이켜 쓰임 받으며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할 선배신앙인이 때를 지어 오히려 잘못되는 세상을 앞장서서 만들게 되었을까? 자괴감이 듭니다.
찬찬히 두어 번 보면서 남는 괴로움이 또 있습니다. 출연해서 한 마디 한 마디 아픈 말들을 하는 학생들의 표정이 자꾸 잊혀지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들이 흘러 지나가는 게 아니라 바위에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자꾸 한곳을 파고들어와 그냥 마음이 울적해졌습니다.
“19살의 나이를 가진 아이들에게 왜 그렇게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을 뽑겠다는거지요?”
“노력만으로는 뛰어 넘을 수 없는 벽, 출신의 벽 앞에 서면 답답하지요.”
어느 학생이 너무 무거워지고 좁아지는 대학입시준비에 허덕이다 내뱉은 인터뷰 말입니다.
자꾸 누구에겐가 묻고 싶어집니다.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신처럼 뛰어난 스펙과 성공한 모델인가요?”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그런 차별된 재산 재능 기회들인가요?”
“정말 우리가 앞서서 그렇게 잘되어야만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가요?”
세상도 그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낮은 바닥과 추운 뒷골목에서 쓰러지고 울게되는데,
우리까지 더 보태서 가속화를 하자구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바울이 새삼 위대하고 부럽습니다.
가마리엘 문하생의 명예와 로마 시민권의 지위, 당당하게 보장될 수도 있었을 모든 가능성조차 분토만도 못한 것으로 여기고 버립니다.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남들은 움켜쥐려고 평생을 아등바등하는 대상을.
하기는 하늘 권세와 독생자의 자리도 내어놓고 천한 세상으로 와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예수를 사모하는 사람이 무엇에 메이고 무엇에 관심이 가겠습니까.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예수 따라 사는 신앙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려면.
방법이 아니라 방향을 생각하며 되돌아본 방송이었습니다. 추가로 확인을 하면서 읽은 가일아빠 이응도 목사님의 글이었습니다.
'공부의 배신' 1부 바로보기 => http://www.ebs.co.kr/tv/show?prodId=348&lectId=10512372
'공부의 배신' 2부 바로보기 => http://www.ebs.co.kr/tv/show?prodId=348&lectId=10512638
(2부, 3부는 무료가 아니라서 다시보기 값을 내야합니다. 천원인가? 그럴겁니다.)